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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순 Oct 27. 2024

성장과 도전의 의미

<라따뚜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라따뚜이는 역시나 처음부터 거부감이 많이 드는 작품이었다. 세상에! 쥐랑 요리가 함께 공존할 수 있다니! 그리고 2007년이면 아직 영화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어린 시절이었다. 그래서 개봉하는 순간에는 보지 못했다. 이 작품을 다시 접하게 된 곳은 특이하게도 중국이었다. 초등학교 때 겨울 방학마다 학교와 연계되어 있던 어학 연수를 한 달 간 떠났다. 그 곳에서는 중국의 대학과 연계하여 중국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배웠던 중국어는 또래 중국 친구들에게 배운 중국 욕밖에 없다. 


이 어학 연수는 중국에 정착한 한국인 부부 선생님? 분들이셨다. 중국어 공부는 평일에 하기에 주말에는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놀았다. 중국은 정말 엄청나게 크고 넓어서 많은 곳을 돌아다녔던 우리는 이동하느라 자동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굉장히 많았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들이 틀어주셨던 많은 작품들 중 내 마음을 울렸던 것이 <라따뚜이>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영화를 엄청 좋아하는 부모님과 함께 영화를 보러 다녔다. 나는 영화관에서 보는 것이 진정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품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고 시끄럽고 작은 화면에서 나오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라따뚜이>는 내 마음을 뜨겁게 만들었다. 


라따뚜이는 정말 간단하지만 훌륭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Anyone can cook!" 


"그 누구라도 요리를 할 수 있다!"라는 구스토의 말이 '애식가'인 생쥐 레미를 울렸다. 레미는 구스토의 말을 듣고 '하찮지만 되도록이면 깨끗한 재료들'을 모아 요리를 만들어 먹고 있었다. '레미'는 프랑스의 구스토 식당에서 또 다른 주인공 '링귀니'를 만나게 되고 두 주인공은 삶을 함께하기 시작한다. 요리를 하지 못하는 인간 링귀니와 요리하는 생쥐 레미. 최고의 식당을 운영하고 최고의 식자재를 관리해야 하는 멋진 요리사들은 처음 요리의 적인 생쥐 레미를 보았을 때 질색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요리의 위생 관념이 없고 실수투성이이자 허당인 링귀니였기에 하찮은 생쥐 '레미'에게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고 대화를 시도할 수 있었다.


나중에 사랑에 빠지게 되는 꼴레뜨가 처음 링귀니와 친해지고 츤츤대면서 많은 것들을 설명해줄 때 인상깊은 대사가 등장한다. 


"우리는 요리사가 아니라 예술가나 해적이지!" 


이 얼마나 멋진 대사인가? 


나는 음악을 정말 사랑한다. 언제나 새로운 날을 시작할 때는 내가 사랑하는 음악과 함께 시작한다. 나는 힙합을 사랑하고, 직접 내 이야기로 가사를 쓰기 위해 철학과에 들어갔다. 나는 힙합은 물론 내가 사랑하는 '음악'을 하고 싶다. 어머니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예술로 만들기를 바란다고 항상 말씀하신다. 그래서 꼴레뜨의 대사가 더욱 가깝게 다가왔을 것이다.


작중 빌런은 아니지만 마치 최종 보스처럼 등장한 '이고'는 미식가라고 자신을 칭하는 링귀니에게 불쾌감을 드러내고 자신은 미식가(like food)가 아닌 애식가(love it)라고 표현한다. 


'맛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하는 것을 '사랑한다'. 


교수님은 내가 항상 "음악과 영화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사랑한다'라는 것에 대한 진정한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 물어보신다. 교수님 말씀을 듣고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사랑한다'는 것은 '미쳐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교수님은 많은 예술가들을 사랑하고, 내가 영화 그 자체와 그 영화가 만들어지게 된 경위를 모두 파악하는 것처럼 교수님도 자신이 사랑하는 작품들의 비하인드를 찾아보신다. 최근엔 매년 죽어 버려지는 닭들에 대한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 한 분의 비하인드를 찾아보셨는데 전국에 있는 모든 닭 농장을 찾아다니며 무더기로 버려진 수십 만 마리의 닭 시체를 보고 아픔을 느껴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시킨다는 이야기를 전달해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이고'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음식을 즐기는 것이고, 그가 던졌던 많은 부정적인 평가들은 요리에 대해 진정으로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예술가'가 되지 못했던 요리사들에게 던졌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처음 시작할 때 잘 알지 못한다. 나의 어머니는 글쓰기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강의를 하신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누구라도'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바쁜 삶을 살아가고 계신다. 영화를 보면 볼수록 어딘가에서 보았던 연출이 떠오르고, 어떠한 구도로 무엇을 강조하기 위해 어떤 기법을 사용하는지도 알게 되고, 인상적인 순간의 장면이 아닌 영화의 전체적인 것에 대해 보기 시작하면서 어릴 적과 다르게 불쾌한 느껴지는 영화들이 많아졌다. 이는 어떤 의미일까?


이는 요리를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편견 없이 레미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링귀니와 같은 건 아닐까. 

지금 나는 글을 쓸 줄 모르기 때문에 온전히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Anyone can wr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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