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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보내는 편지

by 리좀

너 아직 그곳에 있구나

슬픈 일 예쁘게 덧칠하고서

아름다운 기억만 남겨두고도

언제나 헛헛한 맘 가눌 길 없어

우두망찰 두리번거리는 너

아직 그곳에 서 있구나

곱게 덮으면 사라질 줄 알고

꺼내기 두려워 도망친 날들

빠른 걸음으로 내달았어도

언제나 너보다 먼저 와 있는

슬픔의 얼굴 외면하느라

한참을 시절과 싸웠구나


잘못이 무언지도 알지 못한 채

용서를 구해야 했던 날들과

원하는 것보다 먼저 있었던

가야 할 길을 헤매 다니며

슬픔의 얼굴을 지우기 위해

네 얼굴을 먼저 지워야 했구나


빛나는 것들을 쫓아가느라

네 안의 빛이 꺼지는 줄 모르고

이름이 있으되 불리지 못한

네 곁의 꽃과 나무들처럼

소리 죽여 낮은 숨을 쉬었구나

연회색 배경처럼 살았구나


언제나 내 것처럼 보였지만

한 번도 내 것인 적 없었던

무엇이 내 것인지 알지 못한 채

끝끝내 내 것이라 믿고 있었던

두고 온 네 이야기 잊고 있었구나

숨겨 온 네 얼굴을 마주해야겠구나


너 아직 기다리고 있구나

어른의 갑옷 입은 내가 찾아가

한눈에 작은 너를 알아보고서

뜨거운 손 내밀며 화해할 시간

우는 법을 잊었던 모습 그대로

기다리고 있구나

오래도록 기다리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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