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상자에 오래 숨을 수 없어요 아이밥줄시간이에요

다가 올 그 죽음의 순간에 적어도 이미 태어난 존재일 수 있도록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 흐리고 비가 왔다 갔다..


한국은 그래도 날씨가 이 지경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국에선 날씨가 이 모양이 아닌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살았다. 햇빛결핍에 대한 무지 때문이었다.

해가 좋은 날이 많은 것에 감사하고 살기 위해서는 햇빛결핍을 경험해봐야 한다는 건가.



그래 이제 안다. 햇빛을 보고 사는 것은 축복이라고.



이 하나의 감사함을 알기 위해서 십 년의 결핍기간이 필요했다니..


‘어떤 사람’은 누군가의 글만 읽고, 영화만 한 편 보고도, 그 영감이란 걸 받고 감사한 삶을 산다고 한다. 그 '어떤 사람'에겐 몇 분 혹은 몇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나 자신이 무척 바보스럽다.


바보..? 미안.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사는 것일 뿐인데, 그들 개인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근데 너, '그들'이라고 했니?


바보가 바보에게 바보라고 하는 꼴이라니..


네가 뭔데 사람을 판단하고 규정하는 거니..


어디서 잘난 척이야. 아직 덜 깨진 거지. 너, 정신 차려.





오전 7시 30분에 아이를 깨워서 옷을 챙겨준다.

7시 50분에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아이에게 빨리 먹고 씻으라고 잔소리를 하면서 머리를 빗겨준다.

늦어도 8시 20분에는 출발해야한다.

혹시 비가 와서 차가 막힐 것 같으면 10분 일찍 출발한다.

8시 30분 정각에 도착을 못하면 닫힌 문 앞에서 남편의 스트레스지수는 격증하여 아이에게 못 볼 꼴을 선사할 것을 잘 알기에 나는 아침부터 불안하다.


10시쯤 슈퍼를 갔다 온다. 매일 가는 것은 아니다.

메뉴에 따라 다르지만 늦어도 11시에는 점심을 준비해야 한다.

11시 30분이면 아이 학교로 출발한다.

11시 45분에 교문이 열리고 집으로 밥을 먹으러 가는 아이들이 선생님과 함께 등장한다. 1학년 2학년은 아래교문으로 나오는데 26명의 학급정원을 가진 딸아이 반에서는 남학생 한두 명과 우리 딸이 주로 나온다. 금요일은 예외적으로 여자아이가 하나 더 있는데 그룹을 만들어 딸아이를 괴롭혔던 또 여전히 괴롭히는 레아.. 정신건강을 위해서. 후.. 패스


픽업해서 집에 데려오면 12시 10분,

점심을 먹고 나면 13시 안팎,

늦어도 13시 30분에는 집을 나서야 한다.

13시 35분에 교문은 다시 열리고 45분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닫아버린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14시가 조금 넘는다.

2시간 정도 지나서 16시에는 슬슬 아이를 데리러 가기 위해 간식을 준비하고

십 분 뒤엔 집을 나서고 아이를 찾아오면 17시가 다 되어 간다.

방과 후 활동이 있는 날은 17시 30분까지 데려다줘야 해서 20분 안에 간식을 먹이고 출발한다.

18시 30분에 수업을 마치고 데리고 와서 19시에는 저녁상차림이 되어야 한다.


20시 10분에 이를 닦고 씻고

20시 30분에는 동화책을 읽어주고 잠자리를 봐주고

21시 넘기 전에 아이방에서 나온다.



어쩌면 이렇게 쉴 새 없이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내 정신건강에 훨씬 좋다.


이곳 프랑스에는 6주를 공부하고 2주를 쉬고, 7주를 공부하고 4주를 쉬는 식으로 바캉스가 규칙적이고 잦은 편인데, 나에겐 학교 없는 기간들이 아주 불편하다.


어느 순간부터 따박따박 찾아오는 이 바캉스, 어딘가로 떠나서 즐긴다는 것을 생각해보지 못했다. 떠났던 시절에도 즐겨본 적이 없었다.


휴가 때만 되면 거의 매번 그는 몸에 쌓여있던 쓰레기를 온몸으로 다 게워내고, 나와 딸아이는 그 직격탄을 제대로 맞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 오전은 괜찮지만 저녁엔 어찌 변할지 모르고,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는 그런 불안감이 그렇지 않은 시간까지 좀 먹게 한다.




진정 이 모든 것이 돈 때문일까.


입에 올리기도 불편한 '돈'이라는 말.


적어도 인간이 나약할 때 목덜미를 잡고 흔들 만큼의 '잔인성'은 충분히 그 안에 있어 보인다.



그 인간이 쓰러져서 거품무는 것을 보는 것이 익숙하지만 매번 마음이 산산조각 난다. 한 조각 한 조각 겨우 붙여둔 형태는 다시 또 부서져 내리고 또다시 모으고 붙이고 다시 또 그리고 또다시..


이제 고상한 가면 따윈 거추장스러워 던져 버리고 괴성을 내게 만드는 '야만성'까지 덤으로 던져주는 '돈'.



지금 그것을 따박따박 벌어오라고 저렇게 발악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약물중독으로 뇌가 작동이 잘 안 되어서 직장에서 빌빌대고 집에 와서 외국인 부인과 어린 딸 앞에서 화상 짓을 하는 것인지..


말을 할 줄 모르는 한 마리의 동물. 중얼중얼 징징...


지하로 내려가서 알코올 충전이 되면 저 울음소리는 더 강력해진다.


네가 하는 건 폭력이라고 저 인간에게 말했다.


난 아무도 때리지 않았기 때문에 폭력이 아니라고 한다.


기본도 모르는.




내일 아침엔 또 리셋된 머리를 장착하고 세상 평온한 얼굴을 들이밀 테고.


제정신이냐. 너만 잊는다고 있었던 게 없는 일이 되냐


'잘 잤어?'라고? 무슨... 어디서 개풀 뜯는 소리를 하고 있어.


진짜 어이없네


답 안 나오는.


병원은 절대 안 갈 거란다. 기록 남는 것이 싫다?


이기적인.


제발 치료 좀 받아




나는 오늘도 일을 찾고 있다.



돈만 던져주면 한동안은 잠잠하니까





밥은 먹고 다니냐.


어, 수프


어떤수프? 또 라면?


어, 신라면.


어휴...


프랑스 놈이 한국컵라면 쟁여놓고 점심때 혼자 끓여 먹고..


애잔하다 애잔해


사무실에 냄새 풍기면 마튜가 또 좋아하겠다.

눈치 없는.


어이휴..


도시락은 죽어도 안 가져가지.


네 엄마는 내가 안 싸준다고, 집에서뭐하냐더라


사람들 눈치는 더럽게도 보면서


니 마누라는 만만하지



그래...

그렇다고 치고.


제발

술 쳐 먹고 아무 데나 오줌 싸지르지 말고

징징거리면서 웅얼웅얼거리지 말고

정신줄 좀 잡고 그렇게 좀 강해져 봐라 쫌


가능하겠냐?

어이휴..


십 년이다. 이 시끼야.


좀 변하자


가능하냐 안 하냐


쫌!




예전엔 왜 몰랐을까


그 도도한 인간성을 유지하며 살기 위해서는 그 '틀' 안에서 '좀 더 인내하는 법' 정도는 적어도 배워야 했다는 것을. 작은 노력 정도는 해 봤어야 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처럼.


야자를 척척해내던 그때 그 시절 우리 반 그 ‘보통’의 여자아이들은 그때 그렇게 빡쎈 입시 백신을 맞았기 때문에 시름시름 앓지 않고 쿨하게 잘 들 살아가고 있겠지..? 산후조리에 돌잔치에 금반지 금목걸이 공기청정기에 에어컨에 따뜻한바닥에 로봇청소기에 큰냉장고에 김치냉장고에 정수기에 예쁜차에 시엄머니친정어머니반찬에 배달음식에 외식에 커피숍에 바다에 산에 미용실에 심지어 자신을 위한 용돈까지…문명의 편리함, 모두 누리며 살겠지?


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잘 모르겠다. 재산다툼을 하는 외삼촌들, 이를 다 지켜보곤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다각도로 미리미리 땡겨 밀어부치는 동생.. 돈이 많으면 할 수 있는 게 많은 건 알지만 이면에 큰 그늘을 맞는 이들이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최초의 약속들은 잊어버린 채 가족 관계 또한 변질되어가는 행태가 보기 힘들었다.


난 그딴 거 없이 사는 것이 훨씬 더 인간답게 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깟 돈이란 걸 끌어모으려고 가족이고 뭐고 안면몰수하는 것, 정말 이건 너무 비인간적으로 보였고 절대 난 그 따위 거 용인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그 모든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다. 돈에 환장한 족속만 벗어나면 더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 옆에 있는 저 놈이 그 돈이란 거에 쫓겨다니며 앚을만하면 징징거리니 아주난감하다. 너무너무…


난 무엇을 이제 추구하여야 하는가.

가치 지향점을 바꾸어야 하는가?


그래 난 예술을 하며 고상하게 살고 싶었다. 부끄럽지만,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난 그냥 아무것도 필요 없고 그냥 걸칠 옷 하나에 작은 공간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하고 작은 집이지만 큰 미소를 가진 한 남자와 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그냥 그 정도면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했다. 그 곁에 있는 아이에겐 평화를.. 하지만 그런 삶은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모든 우리들의 불행의 원인으로 돈으로 전가시키는 것은, 같은 상황을 비극으로 만드는 것은 너의 그 일그러진 유년시절의 자화상에서 기인하는 정신적 미성숙과 가족문화적 열등함에서 온다’는 대전제를 나는 저 새끼 이마빡에 딱 새겨놓았다.


나는 그의 눈을 보지 않는다.

나는 저 주홍글씨를 응시한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저 놈과 줄타기한다.



'측은지심'

측. 은. 지. 심.

네 글자를 되뇌고 또 되뇐다.

숨을 깊게 코로 들이마시고, 천천히 입으로 내뱉어본다.

또다시

측. 은. 지. 심.

다시 심호흡

반복


적어도 몇 년 전까지는 저 인간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옆에서 도와줄 수 있다,

나의 밝고 맑은 이 넘치는 에너지를 나눠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만했다.


가진 것 하나 없고 변변한 직장도 없는 외중녀.

외국인.중년.여자


그게 네 이름표야


누가 누구를 도와준다는 생각을 감히 했었는지.


네가 더 사회적 약자라는 것


너만 몰랐던 거지.


네가 뭐가 잘나서 병든 놈, 이미 망가져 있는 놈을 고쳐쓸 수 있다는 생각을 다 했었니,


참 해맑다 해맑아.


내가 보기엔 네가 더 측은하다.


주제도 모르고 날 뛴 거지




아이가 올 시간이다.


노래라곤 좀처럼 하지 않던 아이. 혼자서는 그 흔하고 흔한 짧은 프랑스 동요 한곡 부르는 일이 없고 함께 부르면 맘이 동하는 것 같았지만 어마가 그 기본적인 가사 하나 제대로 기억을 못 해 한 소절 후 그냥 끝나버리곤 했다. 쁘띠 쁘와쏭 당 로 나쥬 나쥬 나쥬나쥬나쥬... 음.. 끝.


프랑스어 가사를 외워서 부르고 할 정신적인 여유가 어디 있었냐는 변명이 내 머릿속에 다시 차오른다. 이어서 도돌이표처럼 '저 인간이 프랑스인이고 저 인간의 가족이 프랑스인이고 여기는 프랑스다' 그래서 내 뇌가 내 마음이 프랑스어 동요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일 뿐 아이에 대한 사랑이 약했던 건 아니라는 자기 합리화. 나는 프랑스와 관련된 건 다 쳐냈고 그렇게 나는 나를 스스로 고립시켰다.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제 난 갈 곳이 없다. 나에겐 아무도 없다. 아무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십 년이 걸렸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상황 파악을 하기 시작한 것에 오히려 감사를 해야 하나.


곁의 사람들을 처내고 철저히 혼자가 되려는 지 엄마를 보면서 아이는 어땠을까.


네가 무슨 그런 상처를 받았다고 피해자코스프레니.


엄마 주변에서 계속 맴돌 수밖에 없는 네 옆의 진짜 약자에게 네가 지금 무엇을 대물림하고 있는지나 생각해. 너 또한 가해자야.


안다고?


그럼 그냥 그 동굴에서 걸어 나오라고 제발. 지금 당장.


넌 눈이 멀어버릴 거야.


네 세상은 칠흑보다 어두워질 거야. 지금 보다 더.



아이는 보고 있다.


그 눈 속에 누가 보이니 무엇이 보이니



마음속에 차곡차곡 주워 담고 있다.


엄마의 목소리 아빠의 목소리 엄마의 눈빛 아빠의 눈빛




카레라이스를 점심으로 내려고 달걀후라이를 하고 있는데 떨리는 멜로디가 흘러서 내 앞에 와서 선다.


나를 빤히 바라보고 내게 손을 내민다.


너무나 낯설지만 오랫동안 기다렸었다.


와줘서 정말 고맙다.


앞으로도 우리아이에게 그리고 나에게 자주 와서 놀아줘.


그렇게 딸아이의 작고 청아한 노랫소리가 온 집 안을 가득 채운다. 텅빈 구석구석을 순식간에 메꿔 채운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유영을 하듯 내 온몸을 훑고 다닌다.


나를 통제하는 피의 채널 주파수까지 바꿀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신호가 내게 전해진다.




밥을 먹으며, 네 노래를 듣고 엄마에게 엔돌핀친구가 많이 생겼다고 했다.


그 만연한 미소라니...


'너는 나의 엔돌핀'이라는 말을 아이가 참 좋아한다.


무척이나.




고맙고 미안한 내 딸..


감사합니다,라는 이 말이 오늘처럼 자주 터져 나오도록, 너의 유년기에 더 이상 구멍이 생기지 않도록 엄마가 더 강해지도록 '노력'이란 거 해볼게. 안경이란 것도 맞춰 끼고 이 세상을 좀 더 선명하게 보도록 노력해 볼 게. 엄마 마음속에 가득 찬 찌꺼기도 글쓰기를 통해 좀 걸러내도록 노력해 볼 게. 미간에 있는 주름이 더 깊어지지 않도록 웃는 표정도 연습해 볼 게.



네가 행복을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


행복.. 그게 뭔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네가 노래할 때 내가 느낀 그런 마음과 같은 거라면

엔돌핀 공급자로서의 뿌듯함을 느끼는 너를 보며 내가 느낀 그런 마음과 같은 거라면

행복은 마법과 같이 팝. 하고 오기도 하는가 봐.

정말 순식간에 그렇게 오는건가 봐


엄마가 참 좋다는 내 딸,

나도 네가 참 좋아.


엄마랑 함께 노래를 이어 나가자

행복친구 엔돌핀친구랑 친하게 지내보자.


우리에겐 아직 목소리가 있으니까






눈치채지 못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네가 느낄 무겁고 가벼운 그 잦은 소외감을.


내 깊은 슬픔의 커튼을 치고 보지 않을 뿐.



네가 바뀔 수 있다고 해도


변해가고 있는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



원래의 나라는 것은 없다.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어디를 둘러봐도 갈 곳이 없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최초의 나


그녀를 찾아 밖으로 밖으로 나가보자



이곳은 너에 의해 처절하게 박살이 나고 있다


짓밟아줘서 감사하다


깨어져야 한다 무너져야 한다



한 발짝만 더 내딛고


한 뼘만 더 뻗으면


최초의 나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태어날 그 최초의 순간


온전한 삶이 시작되는 그 순간


그 순간쯤 되어야 네 손을 잡아줄 수 있을 것 같다.


너도 너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도록


그때가 되어야 내 마음을 나눠줄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무너져내려도


일단 밥은 계속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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