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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마곰 Oct 05. 2024

가난과 불안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는 법(16)

15장: 홀로 걸어야 했던 길

군 입대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보통 사람들은 부모님과 친구들의 배웅 속에 손을 흔들며 씩씩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입대는 달랐다. 나는 혼자였다. 새벽녘의 어둠을 뚫고, 적막한 길 위에 혼자 선 채로 입영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나에게 왜 혼자 가느냐고 물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도 "그래도 마지막이니 우리가 데려다줄게"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이 나를 배웅하려면, 그날 하루 일을 쉬어야 했다. 하루를 공치는 순간, 그날의 식비와 다음 날의 생활비는 사라진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 배웅을 거절했다. 내일의 끼니를 포기하면서까지 내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혼자였다.


혼자 버스에 올라타며 스스로 다짐했다. 이 외로움도, 이 무거운 현실도 내가 이겨내야 할 몫이다. 그렇게 버스 창문 밖으로 점점 멀어져 가는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며 나를 격려했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 흐르는 감정은 아쉬움이나 두려움이 아니었다. 차라리 기약 없는 긴 여행을 떠나는 이방인의 쓸쓸함에 가까웠다. 가족에게 "잘 다녀오겠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홀로 떠나는 그 길 위에서, 나는 그저 다짐했다. 나는 돌아와야 한다. 살아남아, 또 한 번 생존의 무대 위에 설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원도의 102 보충대에 도착하니, 부모님과 연인들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작별을 건네는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이들이 손을 흔들며 "건강히 지내"라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그 순간에도,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부모님께서 힘들게 쥐어주신 작은 용돈 몇 장뿐이었다. 그조차도 무거워 보이는 작은 가방 하나를 지고, 나는 줄을 서서 부대 안으로 향했다. 그때의 나는 그저 묵묵히 그 상황을 받아들이며 걸어갔다. 아무런 배웅도 없이, 나를 마중할 사람 하나 없이. 그 모습이, 어쩌면 내가 지나온 삶의 축소판과 같았다. 남들은 울고 웃으며 떠나는 자리에, 나는 늘 혼자였고, 그 혼자임을 받아들이는 법을 너무 일찍 배워버렸다.


그렇게 시작된 군생활 역시 고단하고 외로운 싸움이었다.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의 주머니는 텅 비어있었다. 이병에서 병장까지, 당시 군인의 월급은 10만 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월급마저도 나에겐 귀한 재산이었다. 외출도, 외박도 가지 않았다. PX에서 동기들과 군것질을 하며 소소한 즐거움을 나눌 때에도 나는 줄에 서지 않았다. 그런 사소한 낙조차도 나에게는 사치였다. 군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와 기쁨을 포기한 대신, 나는 그 돈을 차곡차곡 모았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당장의 위안보다 미래의 불안이 훨씬 더 무거웠기 때문이다.


남들은 "군대에서 돈 모으기 힘들다"라고 하소연하며 집에 전화를 걸어 용돈을 받곤 했지만, 나는 부모님께 단 한 번도 돈을 달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것이 부모님을 배려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다. 그렇게 나는 내 몫의 돈을 아껴가며 휴가 때를 준비했다. 그러나 그 휴가조차도 온전히 쉴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휴가가 나오면 친구를 만나고, 여행을 가고, 짧은 자유를 만끽하며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려 했지만, 나의 휴가는 또 하나의 ‘생존’이었다. 복학 후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나는 돌아가자마자 삽을 들고 건설 현장으로 향했다. 복귀까지의 짧은 며칠 동안 내 손과 발은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도,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나는 삽질을 멈추지 않았다. 가슴에는 집으로 돌아온 반가움 대신, 돌아가야 할 현실의 무게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군복무 중의 그 몇 년은 나에게 단순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을 저축하는 과정이었다. 나는 미래를 위해 나의 현재를 철저히 아꼈고, 오늘을 버리며 내일의 기초를 쌓아갔다. 휴가비도, 월급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나의 수첩 속에는 ‘생활비’, ‘등록금’, 그리고 ‘예상 지출’이라는 단어들만이 가득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다시 대학으로 돌아갔을 때, 더 이상 선택의 여지없이 좌절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는 당연하게 보였던 *‘평범한 대학 생활’*을 위해 이렇게 나의 자유와 청춘을 쪼개고, 또 쪼갰다.


돌아보면, 나의 군생활 또한 치열한 전투 그 자체였다. 전우들과의 전투가 아닌,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내 안에 있는 절망과 미래의 불안이 끊임없이 나를 억눌렀고, 나의 결핍이 자꾸만 나를 무릎 꿇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멈출 수 없었다. 그 싸움에서 지면, 나의 가난이, 나의 불안이, 나의 꿈을 끝내 앗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작은 월급을, 그 몇 푼의 휴가비를 모아나가며 나의 존엄을 지켰다. 그리하여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버텨냈다.”


그렇게 돈을 모아 휴가에서 돌아올 때마다, 동료들은 내게 물었다. "왜 그렇게 아끼느냐, 그렇게 살아서 무엇을 하겠느냐"라고. 그러나 나는 그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나에게는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 가난 속에서 나의 자존을 지켜야 하는 싸움이 내 삶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군생활을, 그리고 나의 청춘을 보냈다. 한 푼, 두 푼 아끼며 미래를 저당 잡힌 그 시간 속에서, 나는 홀로 싸우며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몇 년간의 ‘의무’였을 군생활이, 나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필사의 전투였다.


군 제대 후 내가 손에 쥐고 나온 것은 많지 않았다. 그저 몇 장의 낡은 지폐와 통장의 잔고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 돈은 내가 스스로 지킨 작은 자부심이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작은 희망이었다. 나는 그렇게 모든 것을 걸고 또 한 번의 생존을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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