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크를 했지만 들어오라는 말이 없는 나무로 된 문 앞에 우두커니 잠시 서있다가 조심히 열었다.
감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굉장히 폐쇄적인 회사라는 것, 또 하나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죽은 회사라는 느낌..? 죽은 회사라는 표현은 그 회사에게 굉장히 실례될 수 있는 발언이지만 구직자입장에선 이 또한 변별력을 위해서라면 좀 더 멀리 내다보는 시선일 뿐이다.
마치 물 밖에 나온 생선이 활기를 잃고 죽은 눈이 되는 것. 그처럼 회사 내의 분위기가 활기 없이 전체적으로 물 밖에 있는 것 마냥 열정이 없어 보이고 도서관처럼 조용하게 흘러갈 때 종종 이런 느낌을 받곤 한다.
역시나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건 '면접 보러 오신 건가요?'라는 말 보다 '어떻게 오셨어요?'라는 말이었다.
애초에 면접시간을 그렇게 정했다면 누군가는 '면접 보러 오셨나요?'라고 물어보았겠지. 역시나 의례적인 전화 약속일뿐. 당사자가 언제 오는지에 대해선 누구 하나 딱히 기억에 담아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차림의 문제인가? 내가 정장을 입고 있으니 마치 영업사원으로 보였나? 아무도 나에게 면접자인지 묻지 않아 내가 먼저 어렵게 입을 떼어 "저 면접 보러 왔습니다.."라고 나지막이 말했다.
'아!'라는 감탄사를 내뱉는 여직원 뒤로 안경 쓴 여자 임원 한분이 보였다. 머리는 적당히 희끗하고 안경은 뿔테안경인지라 멀리 서는 자세히 식별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직함이 적힌 명판 하나만큼은 얼굴보다 더 빠르게 식별이 가능했다. '상 무 이사'
좋은 직함이다. 우리가 직장 내에서 달 수 있는 직함 중 '장'을 넘어 이사라로 불리게 되니, 전무, 상무 등등은 한 회사에서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 짐작이 가능한 부분이기도 했다.
상무라는 분은 멀찍히서 모니터 위로 턱을 살짝 쳐들어 나를 쳐다보곤 '아, 왔네.'라고 말했다.
"저쪽에 계시면 이따 면접 진행하겠습니다."라고 하며 턱으로 회의실을 가리켰다.
가게나 서비스직종이었으면 한마디 곱씹어버릴 정도로 태도는 불순하고 불쾌했다. 뭐 어쩌겠는가 '면접자'는 철저한 '을'이거늘. 이런 생각을 대부분 중소기업 오너들이 많이들 하기에 면접자에게 불쾌한 경험을 안겨주고 면접비조차 주지 않으며 하대하거나 이력서를 읽지도 않고 일단 불러놓고 읽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냥 나만의 소신발언을 하자면 얼마라도 면접비를 의무적으로 지급하는 법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충분히 신중하고 서로 낭비한 시간에 대한 자그마한 보상이라도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에 따른 악용의 여지도 있으니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
다만 면접자리에서 이력서를 읽어대고 궁금한걸 즉흥적으로 물어대니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회사에서 낭비된 내 시간은 보상받을 길이 없기에 늘 아쉽고 짜증 날 뿐이었다.
아무튼 가리키는 방향 끝자락엔 '회의실'이 보였고 조심스레 열어 문과 등을 맞대고 앉았다. 곧이어 입구에서 어떻게 오셨는지 궁금해하던 여직원분이 종이컵에 담긴 커피 한잔을 가져다주었다.
아침도 먹지 않고 면접부터 보러 왔던지라 속이 쓰릴 것이 분명함에도 일단 커피를 받아 쥐고 잠시 기다렸다. 참 이 시간은 무척이나 길고 혼란스러우며 긴장됨과 동시에 가슴은 타들어갔다. 합격할 수 있나? 이 느낌이 만약 합격해서 다닌다면 계속 남아있을까? 시간 낭비일까? 괜히 왔나?
커피가 제법 식어갈 무렵 째깍이던 시계는 이미 면접시간을 더 초과한 9시 10분을 향해가고 있었고 그제사 회의실 문이 덜커덕거리며 열렸다.
이미 그들은 나에게 불친절로 보답 중이었다. 약속시간조차 지키지 않는 회사는 어떠한가.
앞으로의 내 미래가 벌써 반쯤은 그려진 기분이었다. 이게 철저한 '갑질'이지 무엇이겠나.
이토록 낯선 자에게 조차 신뢰가 낮은데 직원이 되면 어떨까?
대뜸 내 이력서 한부를 출력해서 들어오는 상무이사의 모습. 그리고 옆에는 조금 더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남자. 필시 사장이겠거니 했다. 일어서 인사를 하고 그들이 자리에 마주 보고 앉는 모습을 본 뒤 나도 같이 자리에 앉았다.
참 신기하게도 이력서는 미리 뽑아놓은 게 아니라 열기를 머금어서 따끈따끈해 보였다. 이어지는 멘트 때문이기도 했다.
"85년생... 12월... 보자.. 12월이네요?"
"예."
신기하게도 늦은 것에 대해 어떠한 변명이나 미안한 기색조차도 없었다.
"생시가 어떻게 되죠?"
"예?"
생시.. 가 뭐지? 저런 단어가 있었나? 생시가 무어냐고 다시 여쭤보곤 그제야 태어난 날과 시를 말하는 듯했다. 잠깐 내가 철학관이나 점집에 왔나 착각이 들어 그걸 왜 물어보시냐 물으니
"우리 회사랑 궁합이 잘 맞는지 알아보려 합니다."
이쯤 되면 이게 정상적인 회사가 맞나?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내 경력이 궁금하지 않나? 내 업무 역량은? 나이 따위는 그렇다 치더라도 좀 더.. 뭐 없나?
직원 50명 내외의 크레인 제조업체이기에 첫 시작으로 기계산업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되어 냈던 이력서인데 벌써부터 매콤한 놀이동산의 티켓을 끊은 것 같은 면접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무튼 내가 기억나는 시각을 알려주니 책상 위에 올려진 내선으로 아까 나에게 커피를 준 여직원에게 뭐라 뭐라 얘기를 했다.
한 2~3분쯤 지났을까.. 똑똑 노크소리 뒤로 여직원은 종이 한 장을 들고 와 상무에게 건넸다.
보자... 소띠네요? 진(辰) 시고? 우리 회사랑... 보자 보자... 회사에 적응이 어려울 수 있고? 오래 머물지 않을 것 같다. 그러네 그러네. 역마(驛馬)살이 있네요?
내가 말하지도 않을 소리들을 종이 한 장으로 늘어놓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내 사주를 읊어대는 장면에서 속으로 경악하고 있었다.
이때쯤 내 엉덩이는 이미 의자와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시계를 쳐다보는 내 눈동자는 더 빠르게 굴러갔다. 역마살이 있으면 어쩔 거냐고. 돈 앞에선 역마살도 없어지는 게 인간의 보상심리 아닌가.
망했다. 조졌다. 실패했다. 시간이 아깝다. 더 어떤 수식어가 필요하랴. 어떠한 면접을 경험했어도 이보다 매콤하진 못하리라. 그 뒤로는 어떻게 면접을 봤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나는 부정적이었고 불쾌했으며 당신들이 원하는 인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입사 다짐 따위조차도 부정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내 불쾌한 감정이 그들에게 전해지길 바라는 심정으로 아득바득 짜내서 말했다. 내 대답은 아주 건조했고 건성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교묘하게 피했고 입사해 달라는 전화 자체가 오지 않길 바랐다. 거부하는 것조차도 불쾌할 것 같기에.
나를 뽑지 말아 주세요. 나는 당신들에게 어울리는 노예가 아니에요. 사주팔자를 보는 면접을 견딜만한 자를 꼭 뽑으시길 바랍니다.. 속으로 수십 번 되뇌며 자리를 박차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회의실을 빠져나오니 직원들은 청소를 하느라 분주했다. 도대체 왜 청소를 이제야 하는지도 궁금하긴 했지만 내 뒤통수에 꽂아 넣는 듯한 상무의 발언도 대단했다.
이래 가지고 밥 벌어먹겠어? 돈 받아가겠냐고? 여기 봐봐 여기 이거 먼지 어떡할 거야?
죽은 회사가 맞았다. 다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게 아니었다. 오너를 제외한 직원들은 생기가 없다. 탈출할 수 없는 이유라는 족쇄를 하나씩 발목에 찬 채로 어쩔 수 없음을 빗자루질과 걸레질로 피력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각자의 사연에 의거하여 근근이 버티고 있다.
그들은 잘못이 없다. 그저 순간의 선택에 의해 머물러 있는 것. 나는 그저 늪 앞에서 남들보다 빨리 눈치를 채고 점프를 한 게 아니라 뒷걸음질 치고 도망가는 한 명의 면접자일뿐.
얼른 걸음을 재촉해 인사도 대충 하고 문을 빠져나와 깊게 심호흡했다.
면접을 실패했다. 아니 어쩌면 실패한 것이 아니다. 값진 경험을 한 것이다. 나는 이런 쓴 맛으로 한층 성장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절대 이런 곳은 가지 말자고...
괜히 또 눈물이 날까 봐 얼른 차에 올라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잘 먹고 잘 사십시오. 그 좋아하는 사주팔자로 당신들의 회사. 그 미래를 점쳐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