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젊은 여성 동대표(김대표편)

제13화. 다시 손을 들기까지

by 건축학도고니

01. 회의는 끝났지만, 뭔가 시작되지 않았다


입주자대표회의실을 나섰을 때,
저녁 공기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나는 아파트 단지 내 벤치에 잠깐 앉았다.

조명이 깜빡이는 복도,
녹슨 손잡이,
그리고 정지된 듯한 엘리베이터.

회의에서의 모든 장면이 되돌아왔다.




“나는 잘 모르겠소.”

“소장이 알아서 하슈.”


그 말을 들었을 땐 분명 화가 났었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허탈했다.



‘정말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면,
우리 아파트는 누가 돌보지?’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스마트폰을 켰다.
그리고 입주민 카카오톡방에 접속했다.










02. 쏟아지는 회의감



방엔 이미 수십 개의 메시지가 올라와 있었다.
오늘 회의에 참석한 주민들이
각자의 의견을 남기고 있었다.





“오늘 회의 보고, 기대 접었습니다.”
“입대의는 늙은 사람들 놀이터예요.”
“그냥 추진위가 정비나 하고, 우리는 신경 끄는 게 나을 듯.”


누군가는
“이참에 단지 정비보다 리모델링이나 하자”고 말했고,
또 누군가는
“어차피 우리 말 들어줄 사람도 없음”이라며 나갔다.

조금 충격이었다.


내가 느낀 실망이

이 단지 전체의 ‘공통된 감정’이라는 사실이.





‘이 사람들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기대하지 않으니까.
책임지고 싶지 않으니까.’


그게 더 마음 아팠다.
무관심은 방관보다 더 무섭다는 걸,
나는 이미 구로에서 겪어봤으니까.










03. 갑작스러운 알림 하나

그때, 갑자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 홍위원장]




○○아파트 주민 간담회 공지
이번 주 토요일 오후 3시, 커뮤니티센터 소회의실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 가능합니다.
재건축에 관심 있으신 분,

그 외 단지 운영 관련 의견 있으신 분 모두 환영합니다.


단체방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다 몇몇 입주민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저 연예인 위원장, 생각보다 진지하던데요?”
“진짜 주민 의견 들으려고 하는 걸지도.”
“아무튼 입대의보단 나은듯.”


나는 알림창을 가만히 바라봤다.
토요일 오후 3시.
원래는 운동 가는 날이었지만…
일정은 언제든 바꿀 수 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지금 ‘듣겠다는 자리가 열렸다는 것’이었다.










04. 망설임과 결심 사이

그날 밤. 나는 거실 조명을 끄고 소파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또… 실망하면 어쩌지?’
‘또 내 말이 무시당하면?’
‘또 “젊은 사람이 뭘 아냐”고 하면?’


그런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그 모든 걸 막는 건 결국 나 자신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럼,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란 말이야?’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스마트폰을 다시 들고
입주민 단톡방을 켰다.

“홍위원장님, 간담회 참석하겠습니다.
요즘 단지 내 분위기나 개선할 점 같이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05. 작은 용기, 진짜 대화를 향해




그 주 토요일.
나는 약속한 시간보다 10분 일찍
커뮤니티센터 소회의실에 도착했다.

회의실 안엔 이미 몇몇 주민들이 와 있었고,
홍위원장도 준비 중이었다.

그의 모습은 생각보다 소탈했고,
무대 위 연예인이 아니라
이웃 주민처럼 느껴졌다.

그는 먼저 와 있는 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같은 때에 직접 오시는 분들,
정말 귀해요.”


나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 아파트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저도 궁금해서요.”


그 말에 홍위원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같이 얘기해요.
그게 시작이니까요.”


회의실 문이 하나둘 열릴수록
나는 느꼈다.
이건 회의가 아니라 진짜 대화의 시작이라는 것을.

그날의 간담회.
누군가의 말처럼 ‘달라질 리 없다’고 해도,
나는 손을 들고, 말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엔 정말
나부터 바꿔보기로 했으니까.














06. 회의가 마무리 될 무렵



방 안에 늦게 들어온 젊은 남자 한 명이 있었다.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말끔한 차림,
말없이 조용히 회의실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의 동행이거나,
처음 온 예비 입주민 정도겠거니.

홍위원장이 정리를 시작했다.





“오늘 이야기 나눈 것처럼,
다음 주에도 주민 간담회 이어가겠습니다.
가능하면 정상화추진위원회로 만들어보죠.”


“좋아요.
의지 있는 사람들이라도
목소리를 내야 바뀌죠.”



누군가 말하자
회의실엔 작은 박수가 흘렀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그 젊은 남자를 향해 물었다.

“아, 혹시 처음 오신 분이신가요?
이름 여쭤봐도 될까요?”


그가 고개를 들고 조용히 말했다.




“아, 저는…
아파트 입주민 카카오톡방에서 목이버섯이라고 쓰고있어요.”


순간 회의실 전체가 정적에 잠겼다.



“아… 카톡방 방장님이요?”
“그 단톡방, 인원 거의 700명 넘는 그 방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냥 듣고 싶어서 왔어요.
말은 안 했지만…
요즘 단지 분위기 궁금하기도 했고요.”



다른 사람들은 이분이 뭐하는 사람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홍위원장이 그 젊은 청년과 따로 면담을 하자고 한다.



그날 회의는

단지의 현실을 누가 어떻게 바꾸자는 결론까지는

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회의가 끝나고 나오는 길,

나는 ‘뭔가가 시작되려 한다’는 감각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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