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두 번째 시작, 이곳에서는 달라질까
새 주소를 받아들었을 때
그녀는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서울, 동작구. 이제 여기다.’
낯선 동네였지만,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구로에서의 지난 2년은
그녀에게 '좌절'이 아닌 '학습'이었다.
무시당했고, 소외당했고,
하지만 그 덕분에 뭘 먼저 봐야 하는지
어디를 돌아봐야 하는지는 배웠다.
새로 계약한 이 아파트는
준공 33년차,
하지만 세대수는 많았고
주변이 전부 재개발되는 지역이다.
천지개벽하는 동네,
이곳은 서울에서 가장 핫한 정비구역이다.
무엇보다 이미 ‘움직이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미, 재개발은 사업시행인가와 시공사선정까지 진행된 곳들도 많았고
시공사들도 전부 '하이엔드'를 제안했다.
이사 날.
이삿짐을 내리며
이곳의 동향을 먼저 파악해본다.
경비원분에게 묻자
"재건축이요? 추진위원회 벌써 구성됐어요.
위원장이 좀 특이한 분이에요. 방송도 타시고… 소문이 자자해요."
그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방송? 연예인?’
그날 저녁,
엘리베이터 안에 붙은 안내문에서
그 이름을 처음 보게 되었다.
[○○아파트 재건축 추진위원회 홍위원장, 목동에서 추진위원장을 하다가 이사온 분]
어디서 본 이름인데 싶어 검색해보니,
드라마 단역 배우, 예능 출연 경력,
그녀는 작게 웃었다.
‘이야… 여긴 정말 색다른 시작이네.’
이사 온 첫 주말.
그녀는 단지를 한 바퀴 돌았다.
조용한 산책길,
아이들의 소리가 가득한 놀이터,
커피를 들고 유모차를 끄는 젊은 엄마들,
그리고 축구공을 차는 초등학생들.
무언가 확실히 달랐다.
이전 아파트에서는
‘젊다’는 것이 의심의 대상이었지만
여기선 당연한 한 축이었다.
카카오톡 오픈채팅방도
입주민끼리 정보를 주고받고 있었고,
네이버 카페도 게시물이 활발했다.
그녀는 그 분위기가 좋았다.
‘이곳은, 변화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 같아.’
하지만 ‘이상적인 단지’에도
불쑥 현실은 다가왔다.
이사 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멈췄다.
"죄송합니다, 정비 요청 중입니다."
붉은 LED 글씨가 깜빡였고,
그녀는 4층에서 무거운 쓰레기 봉투를 들고
계단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익숙했다.
구로에서도 수없이 겪었던 일이다.
하지만 여긴 달랐다.
이전에선 말해봤자 돌아오는 건
“원래 그런 거예요”였지만,
여기선… 뭐라도 바꿔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입주민 카톡방을 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키보드를 눌렀다.
“승강기 정기점검 주기나 예산 현황이 궁금합니다.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정비 항목 논의하실 때
신규 입주민 의견도 반영되면 좋겠습니다.”
그 글에는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댓글이 달렸다.
“목이버섯: 좋은 의견입니다. 젊은 분들이 다같이 의견을 제시해야됩니다.
혹시 입주자대표회의 참관 관심 있으시면
다음 회의 일정 공유드릴게요 :)”
그녀는 화면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선,
말하면 들리는 사람이 있구나.’
회의가 시작되었다.
나는 입주민 한 사람으로
긴 테이블 뒤쪽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사진속에서 보던 홍위원장도 저쪽에 자리하고 있다.
회의 안건은 재건축 추진에 대한 ‘지원 여부’.
바깥에서는 활기차고 젊은 목소리가 많아
기껏해야 형식적인 논의겠거니 했는데,
의외로 회의 분위기는 차갑고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깨고
입주자대표회장 김종인 씨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90세.
지팡이에 의지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은
어딘가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두려웠다.
“나는…”
“나는 잘 모르겠어.
귀도 안 들리고, 눈도 안 보이고…
뭐가 뭔지도 모르겠소.
그냥 소장이 알아서 하슈.”
순간,
회의장이 얼어붙었다.
다른 입주자대표 몇 명은 고개를 떨궜고,
홍위원장으로 보이는 사람도 역시 말이 없었다.
누군가는 회장님이 연로하신 탓이라 말했지만,
그건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이런 회장 아래에서 단지를 운영하고 있다는 건가?’
관리사무소장이 어색하게 웃었다.
“어… 네. 회장님의 뜻은 소장 위임으로 기록하겠습니다.”
그의 말은 기계적이었고,
시선은 은근히 부녀회장 쪽을 향했다.
부녀회장 김이심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그 신호는 눈에 띄게 노골적이었다.
그 순간,
나는 기시감을 느꼈다.
‘이게 이곳의 입주자대표회의? 결국은 또,
말 잘 통하는 사람들끼리 정하는 회의가 되어버렸구나.’
이건 절차가 아니었다.
연극이었다.
마치 이미 끝난 시나리오를
우리가 읽고 있는 느낌.
내 안에서 무언가가 끓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입을 열기 전에—
50대로 보이는 한명이 대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에 팻말에는 705동 조대표라고 적혀있다.
“회장님!”
회의실 안이 뒤집힌 듯 조용해졌다.
“회장님은 입주민을 대표하는 자리입니다.
‘모르겠다’, ‘맡긴다’는 말로
이 중대한 문제를 덮을 수 없습니다!”
조대표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는 명확했다.
“지금 이 아파트—
전기 설비는 노후됐고,
상하수도관은 위험합니다.
엘리베이터는 고장나고,
단지 곳곳이 이미 경고음을 내고 있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누구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손을 들었다.
천천히,
하지만 단호하게.
“저… 말씀 좀 드려도 될까요?”
회의장의 모든 시선이
일순간 나에게 쏠렸다.
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불편해도,
누군가가 듣고 싶지 않아도.
이제는,
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