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나는 왜 다시 시작했는가
나는 서른둘.
서울에 있는 대기업에 다닌다.
제품기획팀. 기획안에 둘러싸여 하루를 보낸다.
사무실에서 가장 먼저 디자인 컨셉을 열고,
퇴근길엔 카페 대신 네이버 부동산을 켠다.
친구들은 연애를 하고,
취미를 즐기고,
해외여행 계획을 세운다.
나는 그 시간에,
서울 지도에 빨간 펜으로
‘개발예정지’ 표시를 한다.
어릴 때부터 집이 자주 바뀌었다.
전세 만기, 보증금 인상, 이사, 다시 전세.
짐 싸는 게 익숙했고,
짐 푸는 곳에 정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언젠가는 내 이름으로 된 집 하나는 꼭 갖자."
그게 결혼이든, 독립이든,
내가 선택하는 삶의 시작이든.
그 첫 번째 이야기,
바로 지금부터 하려고 한다.
“지금이 아니면, 평생 기회는 없어.”
그녀는 밤마다 노트북 앞에 앉아
서울시 도시계획도를 펼쳐놓고 머리를 싸맸다.
“구로구가 왜 뜨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난 알아.”
그 말은 그녀가 자기 자신에게 한 선언이었다.
유튜브에서 우연히 본 영상 하나,
‘준공업지역이 재건축의 핵심이다’라는 말이 뇌리를 스쳤다.
그 순간부터였다.
퇴근 후,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주 2회, 실전 부동산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홍대 근처의 작은 강의실에서
마치 고시생처럼 맨 앞줄에 앉아
교수의 말 한마디를 빠짐없이 필기했다.
“구로구는 서울에서 마지막 남은 기회의 땅입니다.
왜냐면 여긴 준공업지역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용적률 상향과 지구단위계획 변경이 가능하거든요.”
그녀는 집에 돌아와
서울시 기본계획 자료,
재정비촉진지구 대상지 리스트,
각 구별 도시관리계획 고시를 밤새도록 읽었다.
출력한 A4용지에 직접 형광펜을 칠하며
기억이 아닌 구조로 이해했다.
“사람들이 구로를 무시하는 건… 몰라서야.”
“여기야말로, 서울이 마지막으로 바꾸려는 땅이니까.”
그러다 발견한 아파트가 있었다.
도심지 접경, 500세대 이상,
지하철 도보 10분,
인근 공장 부지 매각 예정.
그리고 무엇보다, 30년 이상 된 구축.
그녀는 계산기를 두드렸다.
전세끼고 매수하면 대출로 커버 가능.
중도금은 모은 적금으로 일부 해결.
수익률은? 지금은 낮지만 향후 개발 가치 폭발 가능성.
“이건 감정이 아니라 분석이야.
난 숫자 보고 결정한 거야.”
매수 계약 날,
부동산 소장은 말했다.
“요즘도 이런 걸 사려는 사람이 있네.
근데 잘 봤어요.
이 아파트는 곧 뭔가 터질 겁니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전, 이미 터진 걸 샀어요.
다만 남들은 아직 그걸 몰라요.”
계약서를 쓰고 나서
그녀는 부동산 옆 편의점에서
혼자 캔맥주를 하나 땄다.
손이 떨렸지만 마음은 단단했다.
“내가 드디어 해냈다.
부모 도움 없이,
내 힘으로 서울에서 내 이름의 집을 샀어.”
그날 밤,
낡은 아파트 거실에 앉아
불도 켜지 않은 채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여기가 내 시작점이야.
바꾸고 싶어. 나도, 이 집도.”
“우리는 그냥 조용히 살고 싶어요.”
입주 한 달 후,
공용 현관에 붙은 공지문을 발견했다.
‘재건축 추진위원회 모집 설명회’
그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날 저녁 7시에 회의실로 향했다.
오랜만에 바지 정장까지 꺼내 입고
노트북과 메모장을 챙겼다.
“오늘이 내가 직접 이 단지의 미래에 참여하는 첫날이야.”
하지만 회의실 문을 열자,
그녀는 멈칫했다.
40평 남짓의 작은 공간,
벽에는 낡은 시계 하나,
그리고 이미 자리를 잡고 앉은 60~80대의 노인들.
"새 얼굴이네."
"몇 동? 어디 살아?"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새로 이사 온 204동 302호입니다.
오늘 회의 내용 듣고 싶어서…”
하지만 몇몇 노인들의 시선은
따뜻하다기보단 경계에 가까웠다.
회의가 시작됐다.
첫 안건은 ‘재건축 필요성에 대한 주민 의견 수렴’.
한 노인이 손을 들고 말했다.
“나는 반대요.
재건축하면 결국 우리 보고 나가라는 거 아니오?
우리 같은 노인은 어디 가서 살아?”
그리고 뒤이은 말은
그녀의 심장을 톡 건드렸다.
“젊은 사람들은 투자하러 들어왔잖아.
돈 벌고 나가면 그만이지.”
그녀는 그 자리에서
한 마디도 못했다.
메모장에 적어놓았던 질문들을
슬그머니 덮었다.
다음 주,
카카오톡 입주자 단톡방엔 이런 글이 올라왔다.
[공지] 젊은 입주민 일부의 무리한 재건축 주장으로
단지 내 분열이 우려됩니다.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자제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가만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난 지금 이곳에 살아.
월세도 아니고, 투기도 아니고,
여기가 내 집인데…
난 왜 이 단지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받아야 하지?’
그날 밤,
엘리베이터는 또 멈췄고
할머니 한 분이 무릎이 아프다며
헛기침을 하며 계단을 올랐다.
그녀는 뒤에서 가방을 들고 조심스레 따라가며 말했다.
“이런 문제,
우리가 함께 해결하려고 노력하면 안 될까요?”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미소조차 없었다.
“우리는 그냥 조용히 살고 싶어요.”
그 순간,
그녀는 벽을 느꼈다.
콘크리트가 아니라,
세대와 감정과 시간이 만든
높고 단단한 벽.
그녀는 거실 한복판에 앉아
조용히 다짐했다.
“이건… 내 한계가 아니야.
이곳이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것뿐이야.”
그리고 그녀는
‘다음’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