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젊은 여성 동대표(김대표편)

제11화. 결심, 그 문장 하나

by 건축학도고니

01. 아무 일도 없는 단지




구로구 ○○아파트, 1990년 준공.
지어진 지 30년이 넘었지만 단지는 의외로 조용하다.
조용하다는 건… 사실 아무도 관심이 없다는 말에 가깝다.






엘리베이터 버튼은 종종 말을 듣지 않고,
현관문 밑에는 가끔 쓰레기 쪽지가 붙어 있고,
어두컴컴한 지하주차장엔 누수가 생긴 지 오래지만
누군가 문제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낮이면 나른한 햇살이 놀이터를 비추고,
벤치엔 노인들이 고스톱을 치며 담소를 나눈다.
아이들 웃음소리, 택배 끌고 오는 주부들,
겉보기엔 평화롭다.

하지만 그런 풍경 속에
‘재건축’이라는 단어는

놀랍도록 존재감이 없다.




나는 매일 생각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절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구나.’















02. 뉴스는 불을 지피고 있다





그날도 아침 7시.
스마트폰 알람을 끄고
뉴스 앱을 열었다.



해가지나고,

정권이 바뀌었다. 집권당도 바뀌었다.



정권과 집권당이 바뀌니,

온갖 부동산 규제를 쏟아낸다.




[속보] 서울 아파트값 5주 연속 상승… 중저가 단지부터 불붙어
[정책] 국토부, 안전진단 강화 재검토… 공급은 그대로
[분석] 규제 발표 직전, 매수세 폭발… 전세가도 급등 중



기사마다 달린 댓글은 서로 욕설과 조롱이 섞여 있었지만
그 사이 진짜 정보는 분명히 있었다.

정부는 규제를 말하고 있지만
현장에선 가격이 오르고 있다.




임대차보호법을 강화한단다.

전세 물건들은 시장에 멸종하면서 사라졌고,

전세가와 매매가가 슬슬 밀려올라가고 있었다.



재건축 재개발의 물건은

갭투자수요와 함께 시장에서 수요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다.
‘규제는 곧 대기 수요의 폭발을 의미한다’는 걸.

준공업지역에 위치한 우리 아파트.
법적으로 용적률 상향도 가능하고,
도시정비계획의 수혜지에 해당한다.
지금 안전진단만 통과된다면
모든 게 달라질 수 있는 상황.

하지만 뉴스는 스쳐지나간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 뉴스를 읽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03. 회사, 그리고 화두는 ‘너네 집 얼마 올랐어?’






점심시간.
회사 사람들과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제일 먼저 나오는 주제는 늘 같다.

“너네 집 요즘 얼마야?”
“야, 이번에 옆 단지 1.5억 올랐다며?”
“나도 이제 대출 한도 땡겨서 사야 하나 고민 중.”




누구는 청약에서 떨어졌고,
누구는 전세대출 끝나가서
‘이참에 그냥 사자’는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조용히 듣는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나는 이미 샀어.
다만… 아무도 모르는 동네에서.’


그리고 그 말을 굳이 꺼내지 않는다.
‘구로에서 샀다’는 말이


집을 사보적도 없는

그리고 사회초년생들

허황만 가득한

경제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웃음 섞인 리액션으로 돌아올 걸 알기 때문이다.




“구로? 거기 아직도 공장 많지 않아?”
“요즘은 마곡이나 흑석이지.”


그 말들이 아프지는 않지만
조금 외롭긴 하다.













04. 경제 스터디, 그들의 대화 속에서




금요일 저녁,
나는 직장 동료들과 함께하는 작은 경제 스터디에 참석한다.
자발적 스터디.


다들 부동산에 진심이다.

누구는 통계를 가져오고,
누구는 주간 KB시세 보고서를 캡쳐해왔다.




“지금 지방도 불붙었어요.
세종, 천안, 심지어 창원도요.”



"지방이 뭡니까..

목포 남악, 군산 나운동.. 이런 곳도 올라요."




“규제 때마다 반등이 더 강해지네요.
이제는 다들 눈치보다 먼저 사요.”




나는 내 노트에 한 줄 적는다.
‘정부 정책보다 빠른 건 시장이다.’

누가 그런 말을 했다.
‘수도꼭지를 조일수록 물줄기는 더 세진다.’




재건축과 도시계획의 타이밍도 마찬가지다.
지금 정부가 재건축 안전진단 강화 조짐을 보인다는 건,
그 전에 신청을 넣은 단지들에겐
사실상 마지막 기회라는 뜻이다.

그녀는 조용히 머릿속으로 계산한다.







우리 아파트.
준공업지역.
용적률 240%.
세대수 500.
노후도 30년.
지금 안전진단 신청이 안 된 상태.




‘지금 갈아타지 않으면, 아예 기회는 안 올 수 있다.’












05. 아파트 안과 밖, 다른 온도




단지 안으로 들어오면
뉴스도, 통계도,
그 어떤 불안도 존재하지 않는다.





청소 아주머니는 담배를 물며
"아이고~ 요즘 애들은 참 똑똑해.
그냥 여긴 살기 좋아요~"라 말하고,
경비 아저씨는 비닐봉지를 들고 웃으며 지나간다.

이곳엔 ‘이만하면 괜찮다’는 공기만이 흐른다.

사람들은 익숙함에 안주하고,
문제는 다음 세대의 몫처럼 느껴진다.





나는 매일같이 괴리감을 느낀다.
밖은 이렇게 들끓는데,
여긴 멈춘 시간 속 같다.

그게 가장 무섭다.



‘누군가는 현실을 보고 뛰고 있는데,
누군가는 여전히 벤치에 앉아 귤을 까고 있다.’














06. 결심, 그 문장 하나




나는 오늘 아침도
뉴스를 읽고,
회사 단톡방에서 시세 이야기를 보고,
경제 스터디에서 정책 분석을 들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뒤로 하고
집 현관문 앞에 섰다.





‘나는… 이 아파트를 떠야겠다.’


이건 분노도 아니고,
애정의 결별도 아니다.
그저 현실에 대한 빠른 인식일 뿐.

나는 이곳에 머무르면
멈춰버릴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먼저 나가기로 했다.

‘남들보다 먼저 준비한 사람만
다음 계단을 오를 수 있으니까.’

그녀는 다시 스마트폰을 들고
중개사에게 문자를 보낸다.




[매물로 내놓을게요. 가격은 ○○○ 기준.]




“다음 아파트는 더 현명하게 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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