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의 집을 다시 읽으며 나는 이 작품이 ‘여성 해방’이라는 말로만 불리기에는 너무 오래된 질문을 품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 희곡은 혁명적인 선언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일상적이라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대화들, 너무 익숙해서 의심하지 않았던 역할들,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어 온 수많은 타협 속에서 조용히 균열을 만들어낸다. 헨리크 입센은 노라에게 거대한 사유의 언어를 먼저 쥐여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노라를 웃게 하고, 장난스럽게 말하게 하며, 남편의 시선 속에서 ‘사랑스러운 존재’로 머물게 했다. 그래서 독자는 한동안 이 집이 꽤 잘 돌아가고 있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그 평온은, 누군가가 생각하는 일을 대신해 주고, 누군가가 책임을 대신 지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균형이었다.
조용하지만 불공평한 균형.
보호의 공간이자 역할의 무대, 안락함과 통제 사이를 오가는 장소. 노라에게 집은 쉬는 곳이 아니라 연기를 하는 곳이었고,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 늘 적절해야 하는 자리였다. 그녀가 인형처럼 사랑받았다는 사실은, 동시에 인형처럼 판단에서 제외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랑은 있었지만, 동등한 대화는 없었다. 이 작품의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노라가 떠나면서 어떠한 분노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을 증오하지 않고, 과거를 저주하지도 않는다. 다만 말한다.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
이 말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처음으로 문을 여는 행위에 가깝다. 그 문이 닫히는 소리(마지막 장면의 문 닫힘)가 그렇게 오래 울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을 기록하며, 나는 노라를 한 인물로만 남겨두지 못했다. 대신 스스로에게 질문이 돌아왔다. 나는 얼마나 자주 이해받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이해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는지, 사랑받는다는 이유로 판단을 미뤄온 순간은 없었는지, 그리고 ‘괜찮다’는 말로 덮어온 불편함 들은 어디까지였는지.
인형의 집은 자유를 외치지 않는다. 대신 자유가 얼마나 외로운 선택인지, 그리고 그 외로움이 왜 때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단계인지를 보여준다. 노라의 선택은 완성된 답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녀는 새로운 삶을 얻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알지 못하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문을 연다. 조용하고 단정하며, 아무 문제없어 보였던 거실. 그러나 그 안에서 가장 큰 침묵은 언제나 질문하지 않는 태도였다는 사실을.
이 작품이 오래 남는 이유는, 노라가 떠났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도 어떤 집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