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 않았기에 미워했고 미워했기에 애썼다.

"불쌍하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엄마를 미워할 수 없었다."

by 은나무


중학생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매일 술만 마시던 수연의 새아빠는 결국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 냄새는 계절을 가리지 않았다.

항암치료의 흔적 거즈와 링거 냄새

어디에나 스며든 불 안 함.


엄마는 병실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고 수연은

그 옆에서 자라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제발 그냥 제발... 빨리 가줘... 남은 우리라도 편안해지게....'


수연은 지쳐있는 엄마를 보며 몇 년을 그렇게 생각했다. 새아버지가 누워 있는 병실.

그 곁을 지키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수연은 또 원망했다. 그가 우리 삶에 들어온 뒤 엄마는 한 번도 웃지 않았다.


"엄마, 그냥... 이제 놓자."

"수연아. 그런 말은 그만하자."

엄마는 가끔 울다가 수연을 밀쳐냈다.

그리고 또 그의 병시중을 들었다.

불쌍한 사람은 새아빠가 아니라 엄마였다.


하지만

엄마를 불쌍하다고 느낀 순간부터 그녀는

엄마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

참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게 엄마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몇 년이 흘러 내가 19살 되던 해.

결국 그가 세상을 떠났고 그녀는 슬프지 않았다.

단 한 방울의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장례식장에 울음소리가 가득했지만 수연은 조용히 가만히 서서 문밖을 바라봤다.


새아버지의 딸 소희는 장례가 끝나고 다시 친척 집으로 돌아갔다. 그 아이는 꽤 울었다.

그 울음에 섞이지 못한 수연과 지칠 대로 지친 엄마는 모든 장례가 끝난 후 한참을 같이 서 있었다.


"수연아 이제 너도~ 너 인생을 살아."

엄마는 그 말만 남기고 힘없이 수연에게 등을 돌렸다.

그게 이별인지 해방인지 그때는 몰랐다.

지금 돌아보면 엄마는 본인 자신도 어찌할 바를 몰라서 그랬던 게 아닐까...


그렇게 수연은 혼자 사는 삶을 시작했다.

다방에서 나온 뒤로 미용학원에 등록했다. 손재주가 좋다고 종종 미용실에 가면 나중에 미용일을 해보라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미용사 자격증을 따고 미용학원 추천으로 들어간 일자리는 분당의 고급 헤어숍.

큰 거울. 고급 가운. 향기 좋은 샴푸.

매일 아침 수연은 머리를 질끈 묶고 그곳으로 출근했다.

그곳에서 마주한 사람들은 그녀가 평생 볼 수 없을 줄 알았던 돈이 많은 여자 어른들이었다.


"어머 인턴이 새로 바뀌었어?"

"드라이는 좀 더 볼륨을 살려줘."


피부가 반질반질하고 머리카락엔 광이 났다.

수연은 그곳에서 샴푸를 하면서도 머릿결을 유지하는데 얼마를 쓰는지 액세서리 값이 얼마나 될지 계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면 초라해 보였다.

언제부터였을까.

수연은 어느새 자신의 존재를 값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길.

엄마가 생각났다.

그녀의 손. 거칠고 틀어진 손톱.

정리되지 않아 흐트러진 머리카락.

수연은 그 엄마를 부끄러워했던 적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걸 어느 순간 받아들이게 됐다.


미용실 인턴의 한 달 월급은 혼자 생활하기 턱없이 부족했다. 세 달이 지나도 통장에 남는 돈은 없었다. 혼자 산다는 건 월세를 걱정하며 밥값을 혼자 내는 일이고 가스비를 제때 못 내 수도꼭지를 들어보는 일이고 겨울에 전기장판 하나에 기대 잠드는 일이었다.


고급 샵의 고객들은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고급 시술을 받고 각종 서비스를 받은 뒤 웃으며 돌아갔다.

수연의 삶은 하루하루 샴푸 냄새에 절어가면서도 가난이 씻기지 않았다. 그리고 6개월 뒤 조용히 미용일을 내려놓았다.


자신의 손에 맞는 건 아직 가위를 잡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혹은 수연의 삶은 가위를 쥐어줄 만큼의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즈음 예전에 알고 지내던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너, 혼자 지낸다며 미용일은 어때? 그 돈으로 혼자 살기 힘들지 않아? 노래방 일은 어때? 같이 해보지 않을래? 그렇게 힘들진 않고 돈은 확실히 많이

벌 수 있어."


수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하지 않았다.

이미 고민할 수 없는 삶이었다.


처음 노래방에 들어간 날.

수연이 앉은자리는 노래보다 '사람'을 듣는 자리였다. 중년 남자들은 술에 젖어 노래를 불렀고 그녀는 박수를 쳤다. 때론 옆에 앉았고 때론 맥주를 따라주었다.


그들이 뭐라 말하든 수연은 아무 표정도 없었다.

'이건 내 길이 아니야.'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계속 미끄러지고 있었지만 스스로 걷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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