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건...

"어린 나는 아무도 묻지 않는 세상에서 이미 어른처럼 살아야 했다."

by 은나무


자퇴를 하고 수연은 저녁에만 하던 알바를 풀타임으로 해야 했다.

학교를 가지 않으니 그 시간을 놀고만 있을 수 없었다.


수연의 엄마도 수연에게

"할 수 있으면 일을 좀 더 해서 엄마 좀 도와줘."


버거웠다.

그렇지만 가난한 살림을 위해 다니고 있던 주유소에서 근무시간을 연장했다.


중학교 2학년부터 하교 후 시작한 주유소 알바.

넉넉지 않은 가정에 수연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고 가정에 보탬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때 유일하게 수연에게 일자리를 준 동네 주유소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18살.

학교를 그만두고 이제는 하루 12시간씩 일을 했다. 삶의 속도로는 이미 이십 대 같았다.

기름 냄새 뜨거운 아스팔트 그리고 수십 번 반복되는 "가득이요." "감사합니다."

하루 종일 차를 닦고 기름을 넣고 천 원짜리 팁에 웃고 또 웃었다. 힘들었지만 익숙해졌다.

언제나 그렇듯 사는 일은 익숙해지는 일이었다.


주유소 소장은 서른이 넘은 유부남이었다.

처음엔 그냥 말없이 일을 잘한다고 칭찬해 주는 그가 고마웠다.

"수연이, 너는 참 눈빛이 맑다."

그는 자주 그런 말을 했다.

일이 끝나고 늦은 밤 슬며시 햄버거 하나를 건네주기도 하고 추운 날엔 따뜻한 핫팩을 넣어줬다.


처음 받는 '따뜻함'이었지만 다 뜻함에 불순한 그림자가 깃들어 있음을 수연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는 수연의 이름을 불러줬고 눈을 마주쳤으며 지나가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도 그렇게 대해준 적 없었다.

그 어떤 선생님도 부모도 친구도.


그래서 수연은 착각했다.

'내가 의지해도 괜찮은 사람일지도 몰라'

하지만.. 아니었다.


어느

그가 뻗은 손끝이 너무 천천히 머물렀을 때 수연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 이건 아니다.'


그날 밤

아무 말 없이 유니폼을 벗어 작은 비닐봉지에 담았다. 그리고 다시 거리로 나왔다.




며칠뒤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누군가 말했다.

"수연이는 요즘 뭐 하고 지내? 일 안 하고 있지? 다방에서 일해볼래?"

수연은 그 단어가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지는 몰랐다. 다만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그냥 옆에 앉아서 차 마시는 거야.

별로 하는 일은 없는데 돈은 꽤 돼."


19살의 수연.

어차피 학교도 다니지 않았고 갈 곳도 없었다. 수연은 그렇게 다방이라는 곳에 들어섰다.


처음일한 다방의 이름은 진부하게도 '은하수'였다.

이름처럼 별빛이 반짝였던 공간은 아니었다. 칙칙한 벽지 눅눅한 소파.

쌍화차 향기와 담배 냄새가 섞여 진하게 배어있고 노랑빛 조명이 있었던 곳이었다.


수연은 진짜 '차'를 날랐다.

가끔은 옆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했다.

별일 아닌 듯 그저 다른 일과 다름없이 일 했다.

그냥 보통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수연은 나이 많은 남자들의 눈빛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사탕처럼 달콤한 말 그리고 그 아래 깔린 지저분한 욕망의 기색.

"어려 보이네. 몇 살이야?"

"네가 웃으니까 커피도 맛있네."

말끝마다 손이 다가왔고 눈빛이 천천히 아래로 흘렀다. 처음엔 놀라고 그다음엔 속으로 욕했고 그러다 어느 순간 수연은 표정을 지우는 법을 배웠다.


웃는 얼굴 뒤에 아무 표정 없이 속으로 숫자를 세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하루를 또 하루를.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수연은 그곳에서도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몸은 거기 있었지만 영혼은 자꾸 멀어졌다.

속에서 자기를 볼 수 없었고 목소리가 귀에 닿지 않았다.


'이건 나의 길이 아니야.'

그걸 인정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수연은 결국 다시 떠났다.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은 채

그 시절의 수연은 늘 떠났다.

주유소에서 다방에서 사람들 곁에서

그리곤 언제나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 혼자 있는 시간 속에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알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제일 어렸을 때. 나는 이미 세상의 가장 구석에서 어른처럼 버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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