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아래 핀 작은 마음.

"나는 그저 누군가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던 거 같다"

by 은나무


새아버지를 처음 본 날.

수연은 낯섦보다 허기진 마음이 먼저였다.


식당 안의 기름진 공기, 엄마의 떨리는 손끝, 그리고 엄마 품에 안겨있는 작은 여자아이.


어느새 네 식구가 되어버린 그날.

수연은 묻지 않았다.

왜 우리와 함께하게 되었는지.

이 아이는 누구인지.

왜 새아버지는 말이 없고, 술 냄새가 나는지....


세 살 된 여자아이, 그 아이 이름은 '소희'였다. 동생이라기엔 어색하고, 친구라기엔 작고 어렸다.

소희는 엄마 대신 수연의 손을 붙잡았다.

작은 손이 수연의 손등에 없히는 순간, 무언의 의무감이 가슴속 깊이 뿌리내렸다.


"언니야, 나랑 자?" 소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누운 방은 겨울비처럼 습했고, 벽지엔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낡은 연탄난로는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고, 숨죽인 밤들이 쌓여 갔다.


새아버지는 매일 술에 취해 귀가했다.

문이 열릴 때마다 소희는 이불속으로 파고들었고, 수연은 눈을 감은 채 귀를 기울였다.


그의 발걸음이 무겁지 않기를, 엄마의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기를.

기도처럼, 주문처럼 날마다 되뇌었다.


어느 날, 수연은 물었다.

"엄마, 우리 아빠는 왜 하늘나라에 갔어?"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등을 돌리고, 소리를 죽여 울었다.

수연은 엄마의 등을 오래 바라봤다.

그 등은 매일 조금씩 더 휘어져 갔고,

수연은 그 곡선을 닮아갔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수연은 자주 혼자가 되었다. 학교에 다녀오면 아무도 없는 집.

수연은 점점 집 밖으로 밀려났다.


"나는 왜 이 집에서 점점 멀어질까?"

어느 날 창밖을 보며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말이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안으로만 깊게 파고들었다.

사춘기라는 단어는 수연에게 그저 외로움과 분노를 설명해 주는 간판 같았다.


새아버지는 그 무렵 술로 인해 병원에 입원했다. 집엔 아무도 없었다. 병간호 때문에 엄마도 병원에 있었고 소희는 자신의 고모에게 갔다.


고장 난 연탄보일러.

한겨울의 단칸방.

수연은 전기장판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밤마다 이불을 껴안고 떨었다.


그 겨울의 냉기는 단순한 추위가 아니었다.

사람 없는 집, 어두운 시골동네, 얼어붙은 마음.

그 속에 수연은 묻었다.

자신의 감정, 물음, 꿈.

모두 침묵 속에 눌러 담았다.




그 시절의 수연은 늘 뒤에서 바라봤다.

엄마의 등, 소희의 뒷모습, 새아버지의 뿌연 시선.

그 누구도 돌아봐 주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수연을 버렸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사랑인지, 방치인지, 연민인지 알 수 없는 마음들. 그 마음들이 수연의 마음속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렇게, 소녀는 어른이 되어갔다.

천천히,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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