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 속에서 피어나는 꿈
작은 방에서의 며칠은 길고도 짧았다.
하루하루는 단순했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공허한 바람이 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연은 근처 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살폈다. 편의점, 분식집, 카페…
그리고 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미용실 문에 붙은 ‘직원 모집’.
문을 열자 따뜻한 샴푸향이 은은히 퍼졌다.
검은 가운을 두른 손님과 분주히 움직이는 디자이너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연은 용기를 내고 조심스레 밖에 쓰인 '직원모집' 글씨를 보고 들어왔다고 말했다.
원장이라는 중년 여자가 수연을 위아래로 훑더니 단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머리 감기나 청소, 심부름 같은 보조일도 괜찮으세요?”
수연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든 할 수 있어요.”
그렇게 시작된 미용실 생활은 예전 대형미용실에서 일했던 것보다 훨씬 따뜻했다.
아침에 출근하면 먼저 바닥을 쓸고 수건을 개고 샴푸실을 치웠다.
손님이 오면 웃으며 인사하고 샴푸를 하면서 예전에 배운 기억을 떠올려 조심스레 두피를 마사지했다.
처음에는 손놀림이 서툴렀지만 고객이
“시원하다”라고 말해주면 괜히 마음이 뿌듯해졌다.
미용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다정했다.
막내인 수연을 챙기며 간식을 건네주고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함께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수연 씨는 참 잘 웃네. 보기 좋아.”
그 말에 수연은 속으로 조금 놀랐다.
내가 잘 웃고 있었나? 하고...
오랫동안 잊고 지낸 표정이 어느새 얼굴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미용실 월급은 예전에 자격증 취득 후 처음 다녔던 때보단 조금 나았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월세와 공과금을 내고 나면 조금은 여유가 남았다.
수연은 그 돈으로 작은 화분을 하나 사서 창가에 두었다. 초록 잎사귀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걸 바라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곤 했다.
일이 힘들 때도 있었다.
하루 종일 서서 머리를 감기고 청소하다 보면 종아리가 퉁퉁 붓고 발이 아팠다.
그래도 매일 같은 시각에 출근하고 같은 시각에 퇴근하는 이 규칙적인 생활이 수연에게는 기적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숨죽이던 지난날들과는 달리 이제는 평범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었으니까...
퇴근길 가게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입꼬리가 조금 올라간 표정.
예전의 수연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편안한 미소였다.
그 순간 수연은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 나, 살고 있구나.”
작은 원룸에서의 생활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아침이면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급하게 끓인 라면이나 토스트로 끼니를 해결했다.
예전 같았으면 대충 아무거나 걸치고 나갔겠지만 이제는 머리도 말끔하게 말리고 옷도 단정하게 입고 출근하는 습관이 생겼다.
이 변화는 미용실에 취직한 이후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무작정 떠나온 이곳에서 처음 발을 디딘 그 미용실은 아담했고 분위기가 따뜻했다.
사장님은 유쾌하셨고 직원들끼리도 유난히 사이가 좋았다. 시술 중에도 손님들과 대화하며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수연은 처음엔 말수가 적었다.
일만 빠르게 배우고 묵묵히 뒤처리를 하는 데 집중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수연에게 먼저 다가왔다.
“수연 씨, 점심 뭐 먹을래?”
“이거 내가 할 테니까 수연 씨는 드라이 연습 좀
더 해봐.” 그렇게 말을 자주 건네주고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예전의 수연은 늘 긴장 속에서 살았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혹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먼저 날을 세우는 일도 많았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잘못해도 누군가 소리를 지르지 않았고 실수를 해도 ‘괜찮다, 다음엔 더 잘하면 되지’라는 말이 먼저 돌아왔다.
그 단순한 말 한마디가 수연의 어깨를 얼마나 가볍게 만드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시간이 지나자 수연의 손은 점점 빨라졌다.
샴푸를 하면서 손님의 두피를 마사지하는 방법. 드라이로 자연스러운 볼륨을 만드는 요령. 염색약의 배합, 비율까지 모든 것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자신이 잘할수록 손님의 표정이 환해지는 걸 보는 게 기분 좋았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수연은 또 생각했다.
‘나 이렇게 잘 웃는 애였나?’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갔다.
예전엔 웃는 게 참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수연은 웃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어느 날 드라이를 마친 손님이 거울 앞에서
“와, 너무 마음에 들어요” 하고 밝게 웃었다.
수연은 가슴이 뿌듯해졌다.
손끝으로 사람의 기분을 바꿀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 수연은 조금 더 멀리 내다보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자신만의 의자 자신만의 손님을 맞고 싶은 마음이 피어올랐다.
‘디자이너’라는 단어가 마음속에서 자꾸만 맴돌았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었지만 생각만으로도 설렜다.
작은 원룸 방 안 벽에 기대앉아 수첩을 꺼냈다. ‘염색, 드라이, 커트, 파마…’ 아직 부족하고 배워야 할 부분들을 적어 내려갔다.
그러다 불현듯 예전의 수연이 떠올랐다.
어두운 노래방 무겁고 숨 막히던 날들
그리고 밤에 몰래 짐을 싸서 도망쳤던 순간.
그 모든 게 너무도 선명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자신의 전부가 아니란 걸 알았다.
수연은 펜을 내려놓고 조용히 생각했다.
지금의 이 평범함이 누군가에겐 지루할지 몰라도 자신에겐 기적 같았다.
그리고 이 기적을 더 오래
더 단단하게 지켜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