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인 줄 알았다.

쉽게 마음을 내어주고 7년을 감옥처럼 살았다.

by 은나무


노래방이란 곳은 어두웠다.

조명도 공기도.

들려오는 말소리도 죄다 묘하게 끈적거렸다.


손님들 틈에서 어깨를 움츠리고 앉아 있던 스무 살의 수연은 그 공간에서 왠지 스스로 어른이 된 듯한 착각 속에 있었다.

수연은 "아가씨"가 되어있었다.


어느 날 수연은 그곳에서 어느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서른 중반이 넘은 사람이었다.

처음엔 그저 손님이었다.

말수가 적고 언제나 혼자였고 괜히 자리에 불러 앉혔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말 한마디 없이 인사만 하고 가곤 하던 사람이었다.




노래방에서 일한 지 그렇게 몇 달 아니 몇 해가 흐른 것 같았다.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넘기는 게 익숙해진 어느 날 수연은 문득 거울을 보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 지친 눈빛 부스스한 머리 낯선 얼굴이 거기 있었다.

“이게 나야?”

목소리가 낯설 정도로 수연은 자신의 모습에서 멀어져 있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으면 결국 스스로도 잊히는 걸까.

거울 속 수연은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순간 가슴속 어딘가에서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났다. 작고 조용한 그러나 확실한 파열음.


그날 밤은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TV도 꺼두고 핸드폰도 내려놓고 불 꺼진 방에 혼자 앉아 오래도록 울었다.


소리도 없이 아주 조용히.

그동안 미뤄둔 감정들이 마치 시간의 틈 사이로 흘러나오듯 터져 나왔다.


슬픔도, 외로움도, 두려움도, 그리고… 분노도. 수연이 이렇게 까지 살아야 했던 상황들 그런 상황을 견디도록 내버려 둔 자신에 대한 슬픔.


“이제 그만하자, 수연아.”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무언가를 그만두자고 다짐하는 데엔 이유가 필요 없었다. 그저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감정 하나면 충분했다.


다음 날 아침 수연은 오래 미뤄뒀던 이불을 털고

방을 치우고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국을 끓였다.

맛은 없었지만 그릇에 따뜻한 국을 담아 먹는 것만으로도 뭔가 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노래방에 더 이상 나가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마담은 뜻밖에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너한텐 여긴 어울리지 않아.”

그 한마디가 고마웠다.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잘했다’는 말을 들은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러면서 말없이 종종 다녀갔던 그 남자가 왔었다며 수연에게 명함을 남기고 갔다고 명함을 건네어주었다.




“밥이나 같이 먹자 밖에서.”

그 한마디에 수연은 어딘가 마음이 풀려버렸고 그렇게 그를 노래방이 아닌 밖에서 만났다.

따뜻한 국밥집에서 밥을 먹었고 웃음기 없는 얼굴로 그는 말했다.


“나 혼자야. 애는 있지만, 이혼했어. 오래됐어.”


그 말을 믿었다.

이 사람은 진짜 혼자인 줄 알았다.

적어도 그동안 수연이 마주해 온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용하고 어른스럽고 다정한 면이 있었다.


수연은 그렇게 그와 만나기 시작했고 어느새 함께 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잘해줬다.

따뜻한 물을 받아주고 옷을 사주고 날 위해 음식을 해줬다. 마치 나를 구원해 줄 사람처럼 느껴졌고 어쩌면 처음으로 보호받는다는 감정을 알게 해 준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그는 수연의 휴대폰을 뒤졌고 연락처 하나하나를 묻기 시작했다.

친구와의 만남도 엄마와의 통화도 눈치를 보게 됐다. 수연의 말투에 웃음에 옷차림에까지 그의 눈초리가 닿기 시작했다.


“왜 웃어? 누구랑 있었어?”

“나 없을 때 어디 갔었어?”


질문이 점점 압박이 되었다.

처음엔 그게 사랑이라 생각했다.

질투도 사랑이고 집착도 관심이라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말과 행동은 수연을 조여 오는 굴레가 되었다.


수연이 무섭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건 그가 술에 취해 집기를 집어던지고 몰아세운 날부터였다.


“너, 내가 아니면 아무도 안 받아줘.”

“밖에 나가봤자, 또 그런 일이나 하겠지.”

“네 인생에 내가 마지막이야.”


그 말에 수연은 점점 작아졌다.

나갈 생각을 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오직 그가 있는 세상 안에서만 자신이 존재할 수 있을 거란 착각에 갇혀 있었다.


수연은 점점 숨이 막혔다.

집 안에서조차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수연의 하루는 오직 그의 기분에 맞춰 움직였고

웃어야 할 때 웃고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이혼하지 않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단순한 의심이 아니라

눈앞에 펼쳐진 명확한 증거였다.

우연히 서류 뭉치를 정리하다 발견한 혼인관계증명서.

거기엔 여전히 그의 배우자 이름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 순간

지난 7년의 시간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분노와 허탈 그리고 깊은 배신감.

수연의 삶은 그와 함께 만든 것 같았지만

사실 그녀는 그저 그의 그림자 속에

갇혀 있었을 뿐이었다.


며칠 동안 아무렇지 않은 척 지냈다.

하지만 마음속에선

'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 울렸다.

그와 함께 사는 한

자신의 이름으로 숨 쉴 수 없었다.


수연은 7년을 그의 말만 믿고 살아왔다.

사랑도 의지했던 시간도 죄다 거짓 위에 세워진 허상이었다.

그리고 무너지는 그 순간 수연이 할 수 있는 건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그날 밤 그는 없었다.

수연은 옷 몇 벌과 지갑 하나를 들고 집을 나왔다.

친구에게 전화도 하지 않았고 엄마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지도에서 손가락으로 찍은 낯선 도시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창밖을 바라보며 수연은 울지 않았다.

이제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 어떤 말에도 기대지 않기로 다짐했다.


사람이 무서웠고 사랑이 싫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나를 잃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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