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
미용에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고 자신감에 불이 붙었을 때, 결혼 후 나는 동네에 작은 미용실을 오픈했다.
친하게 지내던 미용 학원 동기 언니가 미용실을 열었다는 소식이 들리니 괜히 부럽기도 했고, 나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던 터라 집에서 쉬고 있던 나는 특별한 계획도 없이 남편을 졸라댔다.
계획 없는 하는 일을 유난히 싫어하는 남편은 당연히 못마땅해했다. 얼마나 계획적인 사람이냐면,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가면서 3박 4일 일정을 분 단위로 쪼개서 A4 용지에 프린트해 온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도 내 고집은 못 꺾었다.
결국, 미용 기술 하나 달랑 믿고 젊은 혈기로, “동기 언니도 하는데 내가 못하겠냐?”는 시기 반, 용기 반으로 가게를 인수했다.
내가 살던 동네는 작은 재래시장과 안정된 상권이 있었고, 한 집 걸러 한 집이 미용실일 만큼 경쟁도 치열했다. 그중 나도 한 집 딱 차지했다.
내 철학, 내 방식
예전에 나를 가르쳐 주셨던 원장님들이 내게 하던 말이 있었다.
“은정아, 넌 소질은 있는데 열정이 없어. 연습만 좀 더 하면 이름을 날릴 디자이너가 될 텐데.”
열정? 연습? 하루 12시간 근무에 주 1회 휴무, 출퇴근까지 합치면 연습은 꿈도 못 꿨다. 솔직히 유명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욕심도 없었다.
그런 내가 순간의 열정으로, 남편을 졸라서, 막무가내로 가게를 열었으니 참 대책도 없었다.
가격도 내식대로 정했다. 동네 펌 시세가 3만 원, 내가 인수한 가게는 2만 원이었는데 나는 5만 원을 책정했다. 기술에 자부심이 있었고, 저렴한 약제로 머리손상을 배제하며 돈 버는 장사는 하기 싫었다.
내 철칙은 네 가지였다.
1. 모발 손상을 최소화하는 기술
2. 좋은 재료 + 합리적인 가격
3. 집에서도 손질이 편한 디자인
4. 고객을 속이지 않는 정직함
이걸 무기로 삼아 홍보하며 오픈했다.
“원장님, 각오는 하셨죠?”
처음엔 당연히 반발도 있었다.
“왜 이렇게 비싸요?”
“원래 주인은 어디 갔어요?”
“동네에서 혼자 이렇게 비싸게 받으면 누가 와요?”
나는 하나하나 취지를 설명하며 흥정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 기존 손님들은 떠나고, 대신 새로운 고객들이 한 명, 두 명씩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단골 고객이 딸을 데리고 왔다. 20대 중반쯤 되는 아가씨였다. 상담을 마치고 샴푸대에 눕자마자 이 아가씨가 나를 보며 팔짱을 끼고 말했다.
“원장님, 각오는 하셨죠?”
“…네? 무슨 각오요?”
“비싼 요금 받으실 거면 각오하셔야죠. 머리 잘 나오면 다행인데, 안 나오면 그에 대한 대가도 각오하셔야죠. 비싼 돈 받는 거잖아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나는 충분히 설명했고, 고객도 동의해서 맡겼으면서 ‘어디 한 번 잘하나 보자’ 식으로 들렸다.
결국 나는 정중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머리는 제가 만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고객은 황당해하며 “불친절하다, 뭐 이런데가 있냐, 동네 미용실 주제에” 라며 갖가지 모욕적인 말을 퍼붓고 엄마와 함께 씩씩대며 나가버렸다.
또 다른 ‘난제 고객’
그때는 내가 주인이어서 거절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직원이라 거절이 쉽지 않다.
얼마 전엔 단골 고객의 아이 때문에 일이 났다.
6살짜리 아들은 워낙 움직임이 심했다. 앉아서 머리를 깎아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날도 바둥거리다 결국 선생님 손이 가위에 베이고, 아이 귀에도 바늘로 콕 찍힌 듯한 상처가 났다.
아이가 울기 시작했고 머리는 더 이상 깎기 힘든 상황이었다. 내가 나서서 달래보고 머리 조금만 더 다듬자 해도 아이는 완강히 거부해서 어쩔 수 없이 아이 아빠에게 사과를 하고 돌려보냈다.
한참 뒤 아이 엄마가 전화를 걸어와 다짜고짜 화부터 냈다.
“머리를 이렇게 깎다 말고 보내면 어떡해요? 귀에 상처는 또 뭐예요? 누가 커트 했어요? 전문가 맞아요?”
나는 상황을 차분히 설명했지만 엄마는 더 흥분했다.
결국 나도 참지 못하고 “그러실 거면 앞으로는 어린이 전문 미용실에 가세요. 그리고 아이 때문에 우리 선생님도 다쳤습니다.”하고 맞받아쳤다.
내 말에 화가 난 아이 엄마는 잠시 후 가게로 직접 찾아왔다. 고객들이 매장에 있는 와중에도 다짜고짜 다그치며 소리치는 앞에서 정말 성질 같아서는 욕한 바가지 하고 싶었지만, 다른 고객들 앞이라 꾹 참았다.
결국 나는 책임자로서 고개 숙이며 말했다.
“어머니, 진정하세요. 저도 두 아들을 키우는 엄마입니다. 제 말이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이를 비난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제가 화가 나서 말을 잘못했네요.”
그렇게 정중히 사과드렸고 아이엄마를 달랬다. 사과를 받은 아기엄마는 돌아갔다.
내가 다시 잡은 가위
사과했다고 해서 내가 끌려간 건 절대 아니다.
분이 안 풀려 눈에서 눈물이 났지만, 그 순간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10여 년 전에도, 지금도 나는 같은 마음이다.
내가 가진 신념대로, 고객에게 진솔하게 다가간다. 가끔은 힘든 고객도 있지만, 나를 믿고 찾아와 주는 고마운 분들이 있기에 오늘도 나는 가위를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