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내가 살던 동네엔
국민학교 바로 옆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나란히 있었다.
중학교는 우리 국민학교 아이들이 그대로 올라갔고
고등학교는 다른 동네에서도 학생들이 많이 왔다.
그렇게 나도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교에 입학했다.
교복 치맛단이 아직 어색하고
가방끈이 어깨에서 자꾸 흘러내리던 봄이었다.
그 무렵 내 마음은 전보다 훨씬 복잡해져 있었다.
세상은 조금씩 커지는데
내 안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엄마는 이제 예전처럼 내게 매를 자주 들진 않았다.
대신 말이 더 거칠어졌고
피곤하거나 화가 나면 신경질이 폭발했다.
나는 그런 엄마가 점점 싫어졌다.
엄마의 얼굴만 봐도 괜히 숨이 막혔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의 일거리가 내 몫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빨래를 걷고 새로 빨래를 해서 널고 연탄불을 갈고
동생 밥을 챙기며 부엌에 쪼그려 앉아 있으면
뒤늦게 퇴근하며 들어온 엄마는 늘 말했다.
“넌 그게 뭐가 힘드냐. 나는 너보다 더한 일도 했다.”
그 말이 매번 가시처럼 꽂혔다.
엄마는 나를 강하게 키운다고 생각했겠지만
그 말속엔 사랑보다 체념이 더 많았다.
나는 그런 엄마가 점점 이해되지 않았다.
엄마가 그렇게 살기로 선택했으면서
왜 나에게까지 그 고단함을 나누려 하는 걸까.
마치 내가 엄마의 짐인 것 같았다.
엄마는 내게 한없이 기대고
나는 그런 엄마를 원망하며 버텼다.
텔레비전에서는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엄마들이 나왔다.
그 화면을 보며 나는 자꾸 비교했다.
“저런 엄마도 있네.”
그 한마디가 목구멍 안에서 자꾸 맴돌았다.
나는 엄마를 닮고 싶지 않았지만
어느새 말투와 표정이 엄마를 닮아 있었다.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동생이 입양될 때 나도 같이 보내졌더라면
엄마의 인생이 조금은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게 엄마에게 더 나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곧바로 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 걸.’
그 말이 입안에서 돌처럼 굴러다녔다.
말로 내뱉지는 못했지만
그 문장은 마음속 깊은 곳에 오래 남았다.
새아빠가 들어오지 않는 밤이면 엄마는 혼자 술을 마셨다.
연탄 냄새와 술 냄새가 섞여 흐릿한 방 안에서
엄마는 가끔 혼자 울었다.
나는 그 옆에 조용히 앉아 말했다.
“엄마, 울지 마… 나 때문이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가 고생하는 게 다 내 탓인 것 같았고
그동안 미워했던 마음도 미안해졌다.
어릴 땐 엄마가 크고 강한 사람 같았다.
이제는 엄마가 내 키와 거의 비슷해졌다.
어느 날 엄마가 시장에 다녀와 지쳐 앉아 있을 때
그 어깨를 바라보는데 눈물이 났다.
엄마는 여전히 고생만 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런 엄마를 이해하지 못한 채 미워했다.
그게 죄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내게 상처였고
나는 엄마에게 미안한 존재였다.
서로의 고통이 서로에게 닮아 있었다.
나는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엄마의 인생을 함께 짊어진 기분이었다.
엄마가 미웠다가 불쌍했다가 다시 미웠다.
그 혼란스러운 마음의 파도 속에서
나는 하루하루 바람에 흔들리는 꽃처럼 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