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루하 작가]
마흔이 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마음의 골짜기는 조금 얕아지고,
사는 건 덜 흔들리고,
살아온 시간만큼 단단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마흔의 아침은 생각보다 더 복잡했다.
눈 뜨자마자 시작되는 루틴은
내가 정리하기도 전에 나를 먼저 쏟아낸다.
아이의 등원 준비, 출근 준비, 식탁에 남아 있는
어제의 흔적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느껴지는 피로.
커피는 따뜻해질 틈도 없이 식어버리고,
나는 ‘오늘의 나’보다
‘오늘 해야 하는 일들’을 먼저 떠올린다.
그럴 때 사람들은 말한다.
“20년 경력 상담사면 이제 안정됐겠어요?”
나는 습관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조용히 되묻는다.
안정이란… 결국 누가 만든 환상일까.
마흔의 나는 하루에도 여러 역할 사이를 쉼 없이 오간다.
직장에서 상담사, 집에서 엄마, 관계 속에서 아내,
그리고 틈날 때면 딸·동료·친구의 역할까지.
무게가 다른 공들을 동시에 공중에 띄워놓고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저글링 같은 하루들.
그러는 사이, 정작 ‘나’라는 공은 계속 바닥으로 굴러간다.
남편은 집에 오면 하루 동안 쌓인 이야기를 털어놓고,
그날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들어줄 사람은 너밖에 없어.”
나는 상담사처럼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만,
가끔 그 시간조차 눈치 보며 버거울 때가 있다.
남편에게 집중하는 동안, 정작 내 마음을 돌볼 여유는 줄어든다.
결혼 초엔 아이도 없고 맡아야 할 역할이 적어,
서로 이야기하는 시간이 비교적 괜찮았다.
하지만 역할이 늘어나고, 육아와 일을 병행하며
남편과 저녁 시간을 보내야 할 때는 부담이 커졌다.
지금도 완전히 편하지는 않다.
서로의 필요와 한계를 조금씩 이해하려 애쓰지만,
저녁에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간은
여전히 조심스럽고 숨 고르는 순간이 필요하다.
문제는 또 있었다.
아이의 표정과 말투에서
위험 신호를 먼저 찾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는 것.
‘이건 불안의 표현이고…’
‘저건 자존감 신호고…’
직업병은 참 성실했다.
아이의 마음을 읽는 데 익숙해지는 만큼
정작 내 마음은 어느 순간부터 흐릿해지고 있었다.
얼마 전 누군가 내게 물었다.
“요즘 어때요?”
나는 잠시 생각한 뒤,
“크게 변한 건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말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마음에 걸렸다.
정말 아무 변화도 없는 걸까?
아니면 변화를 느낄 틈 없이
그저 지나가기만 하고 있는 걸까?
그날 밤, 집안 불을 하나씩 끄고
마지막으로 방 문을 닫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나는 너무 오래 ‘상담사로만’ 살았다.
누구의 마음은 잘 들여다봤지만
정작 내 마음은 계속 미뤄둔 채였다.
그래서 작은 결심을 했다.
오늘은 상담사 말고, 그냥 사람으로 쉰다고.
거창한 건 아니다.
커피를 새로 내리고, 창가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보는 정도.
아무 역할도, 어떤 수행도 필요 없는 시간.
그저 ‘존재하는 나’로 앉아 있는 몇 분의 멈춤.
그 짧은 순간이 오히려
깊은숨 한 번을 선물했다.
얼마나 오랜만이었던가.
마흔의 나는 이제 조금 안다.
사는 건 늘 성장하고 확장하는 것만이 아니라,
가끔은 멈춰 서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는 일도
삶의 일부라는 걸.
내일은 다시 상담사가 되겠지만
오늘만큼은 사람으로 쉬어간다.
그걸로 충분하다.
https://brunch.co.kr/@ruhaspace
루하작가님의 20대, 30대, 40대의 이야기.
읽을수록 공감 가는 이야기였는데 오늘 마흔의 나를
돌아보며, 그동안의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스스로를 돌보지 못했던 작가님의 생활이 너무 공감되는 글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그들의 마음을 깊이 만져주는 대신 나는 돌볼 시간조차 없이 바쁜 엄마 아내의 삶이 세대만 다르지 늘 한결같다 생각이 듭니다.
작가님의 이번 연재가 삶의 중요한 지점을 나누어 써주셔서 정말 한 챕터 한 챕터가 한눈에 보기 좋았습니다.
함께 연재해 주셔서 감사하고 오늘로 루하작가님도 3회 마지막 연재를 마칩니다.
작가님의 브런치를 통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함께 읽어 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리며 루하작가님의 상담사 이야기는 작가님의 브런치를 통해서 더 오래 글로 소통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은나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