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 머야? 나야말로 어이가 없네?
##4.본전생각 나는 두 번째 만남
나흘 만에 통화에 성공한 우리는 바로 다음날 약속을 잡았다.
"은정 씨 집이 안산이라고 했죠? 안산 어디 살아요? 저 내일 운전면허증 갱신하러 안산에 갈 일이 있는데 가는 김에 만나서 같이 점심할래요? "
나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내숭이란 건 어디 갔는지 냉큼 대답했다.
"좋아요~ 저 내일 아무 일도 없어요 맛있는 거 사주세요!"
나는 원래 그렇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그런 거지 중간이 없다.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다. 남녀 사이도 그렇다.
남편과 처음 만났을 땐 별로였으니 그랬다 치고 지금 은호감이 생겼으니 내숭을 떨면서 뺄 일은 없다.
내 솔직한 성격이 때로는 장점이 될 때도 있지만 가끔은 관계 맺음에 단점이 될 때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냥 솔직한 내 성격이 편하고 좋다. 그런 꾸밈없는 모습에 남편도 처음엔 내가 좋아졌다고 했다. (그러나 남편은 그런 내 성격 때문에 얼굴이 빨개지는 부끄러운 상황에 놓이는 일도 잦았다. 그 이야기는 점차 꺼내 보기로 하고.)
다음날 나는 점심때쯤 연락이 올 거라 생각하고 집에서 느긋이 뒹굴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라? 오전 10시쯤 남편이 서울에서 출발했고 우리 집 앞에 도착하려면 20분 정도 남았다고 한다.
아니 처음부터 시간 약속을 정확하게 하든가 여자가 준비할 시간을 주든가 20분이면 세수하고 머리 감으면 끝나는 시간인데 나는 당황스러웠다.
한참 당황하며 호들갑 떨다가 시간은 5분이나 더 흘렀다. 이제 15분 남았다.
아 몰라 그래 내가 뭐 이 남자 꼬실 것도 아니고 그때 처음 만난 비호감 정도 사라진 거고 한 번 더 만나보고 더 만나다 점점 호감이 생기면 좋은 거고 아니면 그냥 아는 아는 오빠 정도로 지낼 수도 있는 거지 머 내가 굳이 호들갑스럽게 꾸미고 나가도 웃겨 그래 웃긴 거야
그냥 집 앞 패션으로 나가자 그게 더 매력 있을 수 있지 털털한 매력~ 하하하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그러다
정말 세수와 양치만 하고 급하게 머리만 감고 수건으로 털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집 앞이라고.....
그래 에라 모르겠다. 그냥 나가자.
나는 약속시간을 엄청 중요하게 생각한다. 특히 누가 기다리는 게 정말 불편한 성격이다.
도착해서 기다린다니까 마음이 조급해진다. 툭툭 물기만 대충 털고 대충 스킨로션만 바르고 집 앞 패션에
슬리퍼를 신고 헐레벌떡 뛰어 나갔다.
기다릴 남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겠지 분명.
빨리 보고 싶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라고 하고 싶다.
아 그때 나는 나이트에서 헤어진 뒤로 긴 머리를 자르고 단발머리를 뽀글이로 파마를 했다.
그러니까 나흘뒤 두 번째 만나는 날 내 모습은 나이트에서 만난 그 여자가 아니었다.
작은 키를 커버해 주던 10센티 킬힐대신 납작한 슬리퍼.
긴 머리를 묶어 올린 대신 단발에 뽀글이파마 폭탄 맞은 머리.
재킷에 반바지 차림 대신 티쪼가리에 반바지 차림.
어려 보이는 얼굴을 가려주는 짙은 화장대신 주근깨밭 내추럴 까무잡잡한 쌩얼을 장착하고
헐레벌떡 남자가 기다리는 차로 다가갔다. 남자는 차에서 내려 반가운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근데 남자의 얼굴 표정이 살짝 미묘하게 흔들린다.
두 눈이 재빠르게 나를 스캔한다.
'머지?? 나야 나 그날 만났던 나 이은정인데 왜? 머가 이상해? 표정 왜 그래?'
약간의 미묘하게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챈 나는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도 남자를 빠르게 스캔했다.
어라? 생각보다 넙데데한 게 덜하네?
음 생각보다 훈훈하게 생겼어. 착해 보이는 인상이야.
인상이 참 밝고 좋은데?
그날은 머리가 엄청 크고 어깨가 좁아 보이더니 오늘은 생각보다 어깨가 살아있네?
혼자 그러고 생각하고 있는 사이,
남자는 금세 표정을 다듬고 다시 분위기를 바꿔
"잘 지냈어요? 바빴어요? 머리도 못 말리고 나왔네요.. 원래 파마머리였어요?"
"아아 며칠 전에 파마했어요~ 오빠가 이렇게 빨리 올지 몰라서 급히 나오느라 머리 감자마자 나왔어요
하하 금방 마르겠죠~"
"그날 만난 은정 씨 맞죠? 전혀 딴사람 같아요~ 키가 이렇게 귀여웠었나?"
남편은 최대한 포장을 해서 말했다.
"저 원래 작아요 그날은 신발굽이 10센티였어요 하하"
나는 속으로 나 수수하고 생각보다 귀엽지? 매력 있지?
생각하며 작고 귀여운 나의 매력에 빠져봐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보니 이 남자 정말 멀끔한 회사원의 모습에 은은한 향기도 나고 꽤 느낌이 괜찮아 보였다.
그동안 내가 만나던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다른 정말 내가 어릴 때부터 원하던 평범함을 두루 갖춘 사람.
근데 남편은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단다.
'아 짜증 나 이 여자 머야? 내가 나이트에서 잘못 봤네. 키가 왜 이렇게 작아. 애야 머야?
머리는 왜 이래 아줌마야? 머리도 안 말리고 물은 뚝뚝 떨어지고 칠렐레 팔렐레 칠푼이 같아 슬리퍼는 머야
이런 애를 어디 데려가서 밥을 먹어 이런 애 만나려고 나는 오늘 향수 뿌리고 머리에 왁스 칠하고 기대하고 여기까지 반차 쓰고 왔냐? '
남편은 사실 면허증 갱신은 핑계였고 그걸 핑계 삼아 나를 만나려고 온 거였다.
'어쩐지 그날 한 번에 부킹에 성공하고 전번까지 따고 모텔까지 가고 비록 아무 일은 없었지만 여하튼 뭔가 괜찮은 일이 생길 줄 알았는데.... 이 여자는 오늘 밥이나 먹고 끝내야겠다... '
남편은 그날 쓴 술값에 모텔비에 더해서 오늘 쓸 밥값도 시간도 다 아까워 어쩔 줄 몰랐다고 했다.
와 이렇게나 우리는 첫 만남부터 두 번째 만남에서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남편에게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듣는데 나는 너무 빵 터졌다.
나는 두 번째 만난 날 당신이 오히려 너무 호감으로 다가왔는데 나는 당신에게 완전히 비호감으로 정리된 가고 있었다는 게 왜 이렇게 웃기는지...
어쩐지 그날 면허증 갱신하러 갔는데 나는 주차장 차 안에서 기다리라고 하는 게 나를 배려하는 건 줄 알았는데 나랑 같이 가기 창피해서 그런 거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그리고 우리는 남편이 계획한 맛집 대신 우리 집 앞에 있는 뼈해장국 집에서 간단히 해장국을 먹고 헤어졌다.
나는 그런 남편이 좋았다. 여자 꼬실라고 허세 떨지 않고 수수하고 좋네~~라고 생각했고
남편은 나데리고 어디 가기 창피하고 맛있는 거 사줄 돈도 시간도 아까워서 선택한 뼈해장국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이었다.
첫 번째 나이트에서는 내가 남편이 너무 부끄러웠고
두 번째 만남에서 남편은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우리는 그렇게 두 번째 만남도 서로 다른 생각 다른 느낌으로 각자의 착각 속에 두 번째 에피소드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