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총 데이즈 (Thung Chung Days) 캐빈 크루 트레이니 일기
홍콩식 명 퉁청 Thung Chung.
우리가 부르던 한국식 이름 통총.
습하고 축축하던 통총에서의 그날들을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동안 나는 캐빈 크루 트레이니(캐빈 크루 직업 훈련을 받는 사람)였다.
내가 머물던 시간은 겨우 40일이었지만, 내게 그곳은 이상하게도 진하게 남아 있다.
이렇게라도 풀어내지 않는다면 내 마음이 시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곳에서의 날들. 나의 통총 데이즈.
마크와 프레이븐은 캐빈 크루였기에 이미 항공업에 대해, 비행기에 대해 안전 교육에 대해 도가 틀만큼 알고 있었다. 그러니 수업 시간이 편안하지는 않더라도 늘 여유가 있었고 나처럼 두려워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주말이 끼어 있어 교육이 없는 날에는 자기들이 머무는 호텔방에서 파티를 열기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크 삼총사의 또 다른 닉네임은 인어(Merman)였다.
호텔에 있는 수영장에서 날마다 수영을 한다고 붙여진 별명이었다. 홍콩은 우기를 지나 점점 더워지고 있는 계절이었으니 호텔의 수영장은 더 유혹적이기도 했다. 트레이닝이 시작되기 전만 해도 나 역시 내가 머무는 호텔의 수영장에 자주 갔었는데 본격적인 트레이닝에 들어간 이후로는 수영장에 갈 엄두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피곤한 트레이닝 기간 중에도 매일 같이 수영을 하러 갔다고 한다. N호텔의 수영장은 호텔 방 창문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는 저층에 위치했고, 그렇게 마크 삼총사가 수영하는 모습을 본 배치 메이트가 한 둘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침 여덟 시 반부터 오후 다섯 시 반까지의 빈틈없는 수업시간 동안, 아무리 짝꿍이라 해도 강사가 학생(트레이니)에게 질문할 때면 웬만해서는 옆에서 알려주거나 도움을 주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쉬는 시간에 조금 알려줄 수 있어도 수업이 워낙 빡빡하게 이뤄지다 보니 쉬는 시간에 당을 충전하지 않거나, 정말 쉬지 않으면 수업에 제대로 참여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강사가 봤을 때 어딘가 어리숙해 보이고 잘 대답을 못하는 것 같으면 금세 방금 가르친 수업내용을 확인하는 질문의 타깃이 되곤 했다. 그리고 이때 옆에서 친절히 알려주다가는 자신마저 질문 공세를 받는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마크가 내 옆에서 왜 그렇게도 침묵을 지켰는지 이해가 된다. 아니 마크에게도, 너무 많은 질문을 받는 상대가 공교롭게도 자신의 짝꿍인 나였던 것이었다. 게다가 마크와 투 브라더스는 쉬는 시간이면 꼭 어른의 방식으로 숨을 쉬러 나갔다.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이 오면 그 시간이 짧더라도 꼭 갔다. 또 마크는 가방에 작지도 않은 향수를 짊어지고 다니면서 자리로 돌아오면 칙-칙 뿌렸다.
그러니 트레이닝의 첫 번째 안전 교육의 수업시간은 온전히 스스로의 몫이었다. 내게 부족한 부분은 수업 전이나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에게 물어보거나 따로 공부를 해서 채워야 했다. 매일 호텔로 돌아와서는 공부에 매달리느라 나는 점점 몸과 마음이 수척해졌다.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를수록 회사로 출근하는 호텔 셔틀버스에서 내려 시계를 확인하고 세이프티 스쿨에 들어가기 전이면 점점 도살장에 끌려가는 닭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이럴 때 하필 내 옆자리 짝꿍이 마크라는 것도 꼭 운명의 장난 같았다. 배치가 일주일이나 밀려버린 것도, 착실하리라 생각한 짝꿍은 심지어 다른 호텔에 머무는 데다 여유마저 그득 부리는 장난꾸러기라는 것이 말이다. 빡빡한 트레이닝 교육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나도 한국말을 하는 배치 메이트들이 다수인 배치에 있었더라면 혹은 지금 같은 진도를 나가는 사람들이 나와 같은 호텔에 있더라면 더 자주 물어보고 함께 공부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트레이니로서 익혀야 할 수많은 카테고리의 내용들을 마치 도장 깨기 게임을 하듯 하나씩 배워가면서 심폐소생술이나 자동심장충격기(AED)를 혹독하게 실습하던 즈음이었다.
혼자서 공부하는 건 더 이상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참이었다. 본격적인 첫 시험을 앞두고 마침 수업이 없는 날이었다. 나는 억지로라도 회사로 가서 컴퓨터 앞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축축한 날씨와 쌓여 있던 피로에 얼마나 졸렸는지 모르겠다.
그때 마크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Hey, 뭐 하고 있어?”
“뭐 하긴.. 나 회사야. 시험 공부하고 있어.”
“무슨 공부하는데?”
“여기 ~1@#@쪽.”
“괜찮으면 여기로 와서 공부해도 돼.”
그것이 처음으로 마크가 있는 호텔로 가는 발걸음이 되었다.
회사가 아닌 N호텔에서 만난 마크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평소처럼 무스(?)나 왁스로 열심히 머리를 만지지도 않았고 그야말로 캐주얼한 복장에 수염마저 다듬지 않은 컴컴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엑스 캐빈 크루가 아니랄까 봐 방이 아주 깨끗했고, 거울 앞 화장대의 미용 용품은 나의 세배쯤 가지고 있었다. 온갖 수많은 헤어 제품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남자 캐빈 크루들의 공통점인 듯했다.
그날 마크는 내가 모르는 내용, 용어들을 설명해 주었고 또 모르는 게 있으면 다 물어보라고 했다. 자기는 다 알고 있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함께 책을 펴고 공부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고 곧 마크는 침대에 드러누워서 내내 핸드폰 게임을 했다. 심지어 조금 자야겠다며 내 앞에서 눈을 붙이기도 했다. 내게는 그런 마크가 꼭 한 참 어린 남동생 같았다.
그날의 성과(?)는 크지 않았다. 차라리 회사에서 남아 홀로 공부를 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날부로 난 마크와 친구가 되었다.
마크가 어쩌다가 인도에서 캐빈 크루가 되었는지 그 6년의 생활은 어땠는지, 그리고 어떻게 홍콩에 오게 되었는지를 들었다. 공항의 그라운드 직원으로 일하던 마크에게 어느 날 우연히 찾아온 캐빈 크루의 면접 자리. 같이 면접을 본 다른 동료는 캐빈 크루가 되지 못했지만 마크에게 행운을 빌어주었고, 마크는 그 기회를 잡아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지 같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렇게 꿈 이야기를 나눈 건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문득 벌써 오래전 일이 된 프랑스에서의 시간이 떠올랐다. 앞으로 우리가 머무는 이곳을 떠나게 되면 무슨 일을 하고 싶어?라는 말을 밥 먹듯이 했던 때가.
자기네 인도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수줍음을 탄다고 했다. 상황을 재미있게 하려고 가끔 유머를 던져도 마크 삼총사가 대체로 얌전한 이유가 더욱 이해되었다. 장난치기 좋아하는 프레이븐 역시 강사가 질문 공세를 퍼붓거나 심각한 상황이 되면 밀려온 어둠처럼 조용해지기 일쑤였다. 그리고 쉬락은 고요함 그 자체였다. 쉬락은 내게 항상 더운 여름날 어디서가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늘 모두에게 상냥했지만 오직 마크와 프레이븐과만 가까이 지냈다.
엑스 크루라서 뉴비보다 조금 더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트레이니 모두에게 빠짐없이 큰 부담감이 되었던 트레이닝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첫 시험을 앞두고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크의 호텔로 가는 길에 느꼈던 막막함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별개로 친해진 짝꿍 마크.
그날, 마크는 내게 자기 호텔 방 창문 밖을 가리키며 창밖으로 보이는 기찻길과 차도와 인도의 교차가 아주 멋있다고 했다. 이렇게 세 개의 도로가 교차하는 건 인도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라고 했다. 단순한 마크에게는 의외로 남다른 관찰력이 있었다. 통총 하늘로는 늘 비행기가 빈번하게 보였고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도 자주 눈에 띄었다. 그날은 유독 하늘이 무겁고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오후였다.
문득 마크에게는 그때의 시간이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