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고등학교입학시험
내가 중학교를 갈 때는 뺑뺑이로 원치도 않은 멀리 있는 학교를 갔다. 그런데 고등학교는 입학시험을 봐서 붙어야 갈 수 있었다.
교육제도가 제 맘대로였다. 교육은 백 년 앞을 내다보고 해야 한다는데 그때는 갑자기 변하곤 했다.
그때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는 특수반을 운영하며 학교 명성 올리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방학도 없었다. 겨울방학이던 여름방학이던 매일 나와 4교시 수업을 해야 했다.
돈이 있는 집은 따로 과외를 시키고 싶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집은 학교가 다해주니 부모님은 안심이 될 수 있었다. 우리 집은 후자였다.
입학시험에는 체육도 포함되어 체력장을 해야 했다.
전체 200점 중 체육이 20점이니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8월의 뙤약볕아래서도 윗몸일으키기를 했다. 운동장 바닥에 누워서 했다.
흙에 머리카락이 안 닿으려고 누울 때도 팔로 머리를 싸고 조심했지만 끝내고 나면 아이들 등에 흙물이 들었다. 땀에 옷이 젖으니 흙이 따라 젖어서 황토색 흙물자국이 생긴 것이었다. 난 처음에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요즘 누가 운동장바닥에 누워 윗몸일으키기를 하는가!
그 시절은 정말 열악했다. 매트리스 몇 개면 되는데 여학생을 흙바닥에서 굴렸다. 사춘기 여학생인데...
체육이 끝나고 교실에서 수업을 할 때는 교감 선생님이 뒤에 앉아 감시를 했다.
수업 후에 수업내용에 대한 질문이 없으면 우리 반은 혼났다."어찌, 질문이 없을 수 있냐?라고.
거기다가 우리 담임선생님은 방과 후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셨는데 자신이 가는 곳에 공부 잘하는 학생 몇을 데리고 다녔다. 당연히 학원비는 내지 않지만 10시에 끝나 집에 오면 너무 배가 고팠던 기억을 지울 수가 없다. 중간에 사먹을 곳이 없었다.
대신 좋은 학교에 붙으면 그 학원출신이 붙은 것이라 선전으로 쓰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종로에 이름이 걸렸던 적이 있다.
그렇게 중3을 보내고 1월 입시철이 왔다.
그간 준비한 실력만 발휘하자 생각하고 찹쌀떡과 귤을 싸들고 입시장에 들어갔다.
1교시가 끝나면 찹쌀떡과 귤을 하나씩 먹으며 에너지를 채우고 정신을 맑게 유지했다.
그렇게 시험이 다 끝났는데 그리 잘 본 것 같지 않아 발표 내내 긴장이 되었다.
발표날이 되자 동생과 엄마가 합격소식을 들고 달려왔다. 식구들이 너무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엄마는 "이제 엄마의 원이 풀렸다"하셨다.
난 지금도 다시 돌아가고 싶은 때가 있냐고 물으면 그건 고등학교시절이다.
학교는 공립이라 건물도 낙후되어 교실바닥은 삐걱대고 난방은 가끔 조개탄을 때서 심심하면 으스스 떨리게 춥곤 해서 많이 떨곤 했다.
그래도 그 시절로 가고 싶은 것은 엄청난 시험에 시달려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되고 싶은 사람에 대한 꿈이 있었고 그걸 향해 힘들어도 한 발 한 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끔을 향해 나간다는 것이 인생을 살아보니 최고의 가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 시절엔 그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몹시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