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자전거 타고 휴일에 방문한 외과 수술의!
한참을 기다려 남편의 이송이 시작되었다.
엠블란스를 타고 남편과 같이 외과 병원으로 갔다.
그 도시의 대학병원은 내과와 외과가 버스 한 정거장은 떨어져 있었다.
외과의사 말로는 "낮에 찍은 CT에서 가슴에 종양이 발견되어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 아직 암인지는 말할 수 없다. 수술시간이 기니 집에 가서 기다려라! "라고 담당의가 나에게 말했다.
여태껏 내과에 있어서 외과의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수술은 가슴뼈를 톱으로 열고 진행한다. 내일 아침에 보자! " 며 남편 침대를 끌고 들어갔다.
남편은 안경을 나에게 벗어주고 들어갔다.
그때가 밤 10시 좀 넘었을 때였다.
난 남겨진 안경을 보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멍했다. 뭐라는 말이지.... , 가슴을 연다고...
안경은 왜 나한테 주고 가는 거지?
이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우리 주례 목사 사모님이 나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우리 집에서 나를 위로하며 밤새 옆에 같이 있어 주셨다.
폐에 물 찬 원인을 밝힌다고 1주일을 소비하는 동안 난 이미 지쳐있었다.
남편이 좀 더 있다가 가라고 하면 6시 반이 넘어 학생식당도 문을 닫고 슈퍼도 닫아 잘 먹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저녁을 거의 굶었다.
또 독일 병원에선 식사를 해결할 곳이 없었고 밥도 환자의 것만 나왔기 때문에 점심을 해결하려면 한참 걸어갔다 와야 해서 무척 힘들었다.
사모님이 아무리 위로해 주어도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침대에 누워 밤을 새웠다.
사모님은 "절대 하나님을 원망해선 안된다!"라고 하셨다.
아침 일찍 남편 면회를 위해 병원으로 갔다.
남편은 중환자실에 있었는데 아직 의식이
없었다.
들어가서 남편을 보는데 의식 없이 "어, 어~ "
소리만 내고 가슴은 요오드액이 짙뿌려져 있었다.
20cm쯤 절개해 수술한 가슴 엔 스테이플러 알이 박혀 있었고 옆구리 양옆엔 굵은 호스가 박혀 피를 받아내고 있었다.
톱으로 절단한 가슴뼈는 철사로 묶었다. 지금도 가슴 X ray를 찍으면 이건 뭐냐는 질문을 꼭 받는다.
불쌍하고 나도 무섭고 차라리 안보는 것이 나을 뻔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너무 비참한 몰골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침을 먹으려는데 그간 병원 다니느라 장 봐둔 것이 없어 요구르트 1개가 전부였다. 곧 끝나리라 생각했던 병원 생활이
이제 시작이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니 먹고 내가 힘을 내야지, 그래야 간병을 하지!"
생각은 그랬는데 한 숟갈을 뜨려니 참았던 원망이 터져 나왔다. "하나님! 이러려고 결혼하게 하셨나요?"
사실 양가의 반대로 우린 어렵게 결혼을 했었다.
결혼 때도 나는 많은 기도를 했었다.
그러면서 내 눈에서는 눈물이 나도 모르게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내 나이 28살이었다.
부모형제도 없는 객지에서 이런 일을 감당하기엔 난 너무 아는 것이 없었다. 그 나이 되도록 한 것은 공부 밖에 없었다. 또 자랄 때도 별 어려움 없이 커서 더 몰랐다. 그러니 더 막막했다.
우리 방문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데 방문이 까만 TV화면처럼 보이더니 갑자기 화면 아래 오른쪽 귀퉁이에서 성냥을 켠 것 같은 작은 불씨가 피었다.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보고 있는데 그 불빛은 점점 환해지며 내 앞의 검은색을 다 걷어갔다. 깜깜하던 앞이 환해졌다!
그리고 나더니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내 상황은 바뀐 게 아무것도 없이 망막한데 내 마음의 어둠이 싹 사라지고 뭔가 모를 기쁨으로 꽉 찼다. 심지어 내입에선 노래가 나올 만큼 기뻤다. "난 속으로 내가 미쳤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고 나자 걱정이 되질 않았다.
중환자실에서 나오자 남편은 다시 본래 입윈 했던 내과 병동으로 옮겨졌다.
내과 담당의사는"미안합니다. 젊어서 그런 병인줄 모르고 1주일이나 시간 낭비를 했습니다."
난 할 말이 없었다."괜찮다"라고 하기엔 너무 심각했으니까.
남편은 가슴을 절개해 일어나질 못해 소대변을 다 받아내야 하는데 독일에선 그런 환자 시중은 간호사가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독일사람 불편하다며 나보고 해달래서 나는 그 시중을 다 들었다.
아침도 일찍 와서 식사를 누워있는 남편에게 먹여야 했다. "독일간호사가 주는 것 받아먹기가 불편해!"라 했기 때문이다.
이때는 나의 어려움을 알고 주변 한국사람들이 순번을 짜서 나의 점심을 가져다주어 먹는 때였다.
그래서 굶지 않고 잘 먹었다.
밥을 먹다가도 남편이 부르면 달려가 소대변을 치워야 했다. 그러고 나서도 먹던 밥을 다시 먹었다. 전 같으면 비위가 상한다고 했겠지만
그때는 그 말이 사치라 여겨졌다.
그래서 그냥 먹고 버텼다.
남편은 이제 독일어도 안 했다.
할 말 있으면 모두 나 보고 가서 물으라 했다.
그때 깨달았다. 외국어가 능숙하지 않은 우리에겐 외국말을 한다는 것이 심한 스트레스라는 것을.
그래도 저녁 다섯 시면 가족은 무조건 가야 했다. 가족은 병원에 남을 수없었다. 모두 간호사가 했다.
다음날 아침에 가보니 남편이 없었다.
담당의에게 물어보니 한시가 급해 들것에 실어 방사선을 쬐러 보냈다고 미리 말 못 해 미안하다 했다. 보통은 상처가 아물면 하는데 남편은 급해서 기다릴 수없어 수술, 방사선, 약물을 동시에 한다 했다. 이것을 못 이겨내면 죽고 그렇게 안 하면 죽는다고 했다.
죽는다는 소리를 듣는데도 나는 그리 걱정이 되지 않았다.
들것에 실려 다음번 방사선을 쪼이러 가는데 암에 걸린 할아버지들이 방사선과 앞에 쭉 앉아있었다.
남편은 서른 살이지만 굉장한 동안이라 사람들이 내가 이모 같다고 할 정도였다. 나도 노안은 아닌데.,.
그런 할아버지들 눈에는 남편이 동양의 어린애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so jung, so jung"을 연발했다.
너무 어리다고.
방사선을 두 번 쪼이고 주말이 왔다.
주말엔 치료가 없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찾아왔다.
"내가 당신을 수술했던 의사다. 하도 어려 마음에 남아 어떤가 궁금해 자전거 타고 지나다 들렸다.
흉선의 종양이 폐 뒤쪽에 아기 주먹만 한 것이 있었는데 손이 안 들어가 제거를 못했다. 종양을 다 제거하지 못해 수술은 실패했지만 그 암세포가 빛에 약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 희망을 잃지 말아라!" 하고 건투를 빈다며 그 의사는 떠났다. 수술하던 날 밤에 봤던 의사였다.
우리가 궁금해 휴일에 개인방문을 했던 것이다.
종양이 1cm라도 큰일인데 아기주먹만 하다니 믿기 질 않았다.
즉 수술은 실패라 바로 방사선치료로 들어간 것이다. 남편이 젊어서 종양이 자라는 속도가 굉장하다 했다.
내 평생 그때처럼 앰뷸런스를 많이 탄 적이 없다.
남편은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동안 자신은 너무 괴로워 차가 급정지하여 자신은 침대에서 떨어져 죽게 해 달라고 기도했단다. 나는 옆에서 살려달라 기도했는데,,.
종양세포를 죽이느라 방사선을 세게 쪼이다 보니 부작용이 따라왔다.
입안의 침샘까지 방사선에 의해 망가지며 염증이 생겼다. 감염이 된 것이다.
열이 41도까지 오르고 목이 부어 물 한 숟가락도 삼키지 못했다. 난 아직까지 41도로 체온이 올라간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온몸에 얼음찜질을 하며 열을 떨구려 애를 썼지만 열은 얼음으로도 해열제로도 좀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도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한국 간호사 아주머니는 "암열이라는 게 있는데 아주 무서운 거야. 그러다 죽어!"라 했다.
이렇게 적으니 여러분은 그 간호사분을 사탄쯤으로 생각할 것 같다. 그분은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하나님께 감사하단 말을 달고 사시는 분이다.
우리에게 천사나 사탄의 역할을 하시는 분은 가까이 있는 분이 하지 멀리 있는 모르는 분이 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그때 깨달았다.
그 간호사분은 오다가다 만나기도 했는데 어떤 때는 무서워서 내가 먼저 피했다. 자꾸 고꾸라지다간 못 일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치료가 성공적으로 끝나도 약물이 독해 신장과 방광이 망가져 15년 정도 더 산다."라 해서
완치도 모를 때 벌써 완치 후의 희망도 꺾어 버렸다.
난 또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의사를 찾아가야 했다.
그래서 먼저 피했다.
"하나님! 암세포가 열에 약한 것을 압니다. 이 열로 암세포들이 다 죽게 해 주세요."라고 나는 기도했다
열은 삼 일간 지속되었다.
삼 일간 물 한 모금도 못 마신 남편은 몸무게가 8kg이 빠졌다. 얼굴살도 많이 빠져 남편의 콧날이 날카롭게 느껴지고 눈은 더 커졌다.
병문안온 사람 중에 "이리 잘생긴 줄 몰랐네!"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매일 물리치료사가 와서 누워있는 동안 근소실을 막으려 운동을 시켜주었는데 이 분이 "다리가 점점 뱀 같아진다."라고 했다. 다리근육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에 갔더니 갑자기 병실에 의대교수가 온다며 남편을 씻기고 환자복도 갈아입혔다.
교수는 내과에 1명이 있었다.
독일의대는 교수가 아주 적은 수가 있다.
다른 교수도 마찬가지지만 독일의 교수는 사회적 명예가 있었다.
나머지 의사들은 우리나라 과장이나 전문의에 해당되지 교수는 아니었다.
나이가 지긋하고 퉁퉁한 교수가 나타나자 담당의는 남편의 병명, 현재 치료과정, 열이 안 떨어지고 있다며 설명을 하니 그 교수가 곰팡이 감염이라고 하고 갔다. 그 소리를 듣는데 "아, 이제 열이 떨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약이 바뀌었다. 거짓말처럼 열은 떨어져 이제는 약물치료를 준비하여야 한다고 했다.
역시 교수는 달랐다.
한시름 놓고 집으로 돌아간 그날밤 나는 정말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 꿈은 잊은 적도 없지만 아직도 또렷하게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