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엄마의 삯바느질
어린 시절 엄마는 시장에서 자투리 옷감을 끊어와 언니와 나의 원피스를 똑같이 만들어 입혔다.
어떤 것은 허리뒤로 리본을 매는 것도 있었고 어떤 것은 가슴에 예쁜 단추 3개를 단 것도 있었다.
별도로 옷 만드는 것을 배우지 않았지만 보면 따라 할 줄 아셨다.
당신의 한복도 지어 입으시니 동네사람들한테서 한복부탁이 들어왔다.
아버지의 수입이 일정하지 않고 자녀는 많으니 엄마는 주저 없이 삯바느질을 하셨다.
한복을 만들며 나오는 조각천으로는 내 인형옷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내 인형은 새록새록 새천으로 만든 옷을 가진 옷 부자였다. 그 옷은 내가 만들었다. 그때는 금실 은실을 섞어 짠 반짝이천이 유행이라 인형옷도 예뻤다.
엄마 옆에 붙어 앉아 저고리 동정은 어떻게 다는지 치마주름은 어찌 잡는지 버선은 어찌 만드는지 눈여겨보았다. 엄마 옆에 있으면 난 늘 행복했다.
한복이 다되면 보자기에 싸서 내가 아주머니들께 갖다 드렸다.
"아줌마~ 한복 가져왔어요. 맘에 드시나 보세요." 아줌마들은 고맙다 전하라며 나에게 바느질삯을 주셨다. 나는 그 돈을 쥐고 막 달려왔다. 조금이라도 빨리 엄마가 즐거워하는 것이 보고 싶어서 그랬다.
그러던 중 어느 영화감독이 영화에 쓸 한복 전부를 엄마에게 부탁했다. 엄마는 부지런히 도령복도 마님한복도 대감복도 처녀한복도 지었다. 몇십 벌을 지었다. 지금 같으면 정말 대단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 일을 마치고 제법 큰돈을 받은 엄마는 큰 오빠를 데리고 나가 그간 못 사준 학용품을 다 사주었다.
우리 오빠는 맨날 전교 1등이었다. 엄마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공부를 했다.
이것은 엄마를 힘든 줄 모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난 엄마가 낮잠을 주무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찌 피곤한 날이 없었겠는가!
어찌 아픈 날이 없었겠는가!
오 남매를 키우며 삯바느질까지 하셨던 엄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너희들이 잘해주어 난 힘든 줄 모르고 살았다!" 고하셨다.
어찌 힘들지 않았겠는가!
요즘 말로 독박육아에 가정살림에
돈도 벌어야 했는데 말이다.
그 시절은 외식도 없었다. 삼시 세끼를 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님을 안다.
그런데도 어느 날은 짜장면을 어느 날은 잡채밥을
다양하게 식사를 준비해 주셨다. 언제나 정성스레 준비하셨다.
언제나 상차림을 도우며 밥 먹으러 오라고 언니 오빠들에게 소리 지른 것은 나다.
엄마는 현재를 보지 않고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며 견딘 것 같았다. 자식의 앞날이 희망이 되었고 그 희망이 고된 일상을 가린 것이다.
학교 갔다 오면 언제나 웃으며 "힘들었지?"라며 맞이해 주었다. 그럼 난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우리 시절엔 쓰지 않던 독박육아란 말이 요즘에 쓰이고 있다. 우리 시절만 해도 거의 대부분 독박육아였다. 그래서 이혼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하지 않으면 남편이 힘들어지니 내가 하고 만다가 우리 시절 생각이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있으니 내가 하고 그럴 형편이 안되면 남편이하는 것이 부부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독박육아라 참을 수없고 남편과 대화가 안 통해 이혼한다고 한다.
불과 얼마사이에 사고방식이 너무 변했다.
당연히 아이는 부모의 희생과 사랑 속에서 자란다.
나를 조금도 내어주지 않으면 아이는 사랑이 무엇인지 희생이 무엇인지 모르게 큰다.
받아본 적이 없는 아이는 줄 줄도 모른다.
이렇게 키워 놓으면 늙어서 그 대가를 받는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엄마나 아빠의 희생 없이 온전한 인격은 안 나온다. 하지만 요즘 엄마들은 왜 나만 희생하나라고 생각한다. 억울해한다.
똑같이 해야지...
자로 잰 듯 부모가 언제나 똑같이 희생할 수는 없다.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기울어지는 것을 못 견디면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긴 어렵다.
이런 이해가 없으면 답은 없다!
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엄마의 웃음이 떠올라 늘 행복하다.
엄마 때문에 늘 행복했는데 돌아기시기 전 그 말을 못 했다.
가장 후회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