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각자 계산이라는 게 어색하다.
요즘은 다들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들 하지만,
나는 아직 익숙하지가 않다.
얼마 전, 오랜만에
나보다 어린 지인 다섯 명과 점심을 함께했다.
적게는 다섯 살, 많게는 스무 살 넘게 차이 나는 젊은 친구도 있었다.
부담 없는 자리였다.
저녁 회식도 아니고,
그저 웃으며 안부를 나누는 가벼운 점심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다들 동시에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선배님.”
“각자 낼게요.”
“저희가 더 불편해요.”
순간,
내가 뭘 잘못했나 싶었다.
나는 그저
내가 연장자이니 자연스럽게 내가 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뿐이었다.
늘 그래왔고,
나 역시 그런 대접을 받으며 살아왔기에
그 방식에 익숙했고, 별 의심도 없었다.
예전엔,
그게 일종의 예의였다.
사는 사람이 어른이었고,
사려는 사람을 말리는 게 후배의 도리였지.
“내가 살게.”
“아닙니다, 선배님.”
“됐어, 다음에 네가.”
그런 말이 오가는 게 자연스러웠던 시절.
하지만 그날,
그 말들이 하나도 통하지 않았다.
다들 진지하게,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듯이 각자 계산을 했다.
처음엔 조금 서운했다.
내 마음을 거절당한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오래 살아온 방식이 무너진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커피는 내가 샀다.
“차는 제가 살게요.”
그 말 한마디에 고맙다고 웃어주는 얼굴들이
마음을 조금은 편안하게 만들어 줬다.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시대는 누가 밥을 샀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자리를 어떤 분위기로 함께했는지가 중요한 시대인 것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예전처럼 선배가 밥을 사고, 후배는 또 그 후배를 챙긴다는 ‘룰’이 사라진 대신,
이제는 각자가 서로의 독립성을 존중하면서
그 안에서 편안함을 나누려는 쪽으로 바뀐 것 같았다.
우리가 밥을 샀던 건,
정말 계산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금 더 책임지려는,
조금 더 깊이 연결되려는.
어쩌면 그런 마음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그 방식이 익숙하고,
어쩌면 오래도록 벗어나긴 힘들겠지만...
그날의 친구들을 보며
다른 방식으로도 따뜻함을 나눌 수 있다는 걸 느꼈다.
밥값은 나눴지만,
함께 나눈 대화와 추억,
그리고 웃음은 하나로 남았으니까.
방식은 달라졌지만,
사람 사이를 따뜻하게 하고 싶은 마음만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