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진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장이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 저... 지금이 오늘인가요?
박기진은 질문이 뭔가 말이 안 맞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딱히 뭐라 물을지 몰라 나온 말이었다.
그럼에도 어떤 의미인지 알았는지 사장은 고개를 들어 박기진을 한 번 본 뒤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박기진의 옆에 있어야 할 여노인이 보이지 않았다.
주변이 어지럽혀 있고 사장의 손에는 피가 묻은 손수건이 쥐어 있었다.
- 어떻게 된 거죠? 여자노인분은?
사장은 무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시간이 없었어...
- 제가 다녀온 40년 전의 과거가 변경돼서 미래가 바뀐 건가요?
- 이 기계가 타임머신이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군. 이건 그저 프로그래밍된 하나의 시뮬레이션 장치일 뿐이야.
사장은 서랍에 있던 서류를 만지작 거리며 얘기를 이어나갔다.
- 그녀는 우리 회사의 장기 계약고객이었어. 이제 그 끝을 낸 거고
박기진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그녀의 약속은 그녀의 딸을 데리러 간다는 것이었고.
이게 시뮬레이션이었다면 사실은 딸을 데려온 것이 아니라는 건데. 사장은 계약파기라고...
- 사장님, 딸과 직접 만나게 해 준 것이 아니고... 그냥 시뮬레이션으로 과거의 회상 속에 아이를 찾게 해 준 것이라고요? 이건 사기...
박기진은 사기라는 단어를 뱉었다가 말을 멈췄다.
사장은 정리 중이던 서류더미를 대충 서랍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 사기? 그래 사기라고 해두지. 경영의 경짜도 모르는 인턴 주제에 회사 업무에 이러쿵저러쿵. 이 일이 그렇게 편하고 좋은 일이면 기진 씨 같은 사람이 인턴기회나 얻었겠어? 본인 앞가름이나 잘하시지.
사장은 문을 박차며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사무실 안에는 여사무원과 박기진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 아저씨, 되지도 않는 정의의 사도 코스프레하지 말고 월급 받으려면 시킨 일이나 잘하시죠.
사장은 그렇다 치고 나이차 얼마 안나보이는 여직원이 핀잔을 주자 박기진도 언성을 높였다.
- 아니. 제가 뭘 잘 못했다고! 뭔 놈의 회사가...
소리는 높였지만 금세 기가 죽은 박기진은 노려보는 그녀의 차가운 눈총을 뒤로하고 서둘러 짐을 챙겼다.
- 죽었어요
- 네?
- 그녀의 아이는 죽었다고요
박기진은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여직원의 말은 이러했다.
어떠한 사고로 아이를 지키지 못했고...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담보로 고객에게 돈을 돌려받을 수 없었다고... 그래서 40년을 장기 고객으로...
전당포가 약속 안전 담당을 두게 된 계기가 된 계약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바로 그 안전담당 인턴이라는 사실...
약속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사업.
그 돈을 돌려받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약속이 유효해야 했다.
약속이 약속으로서 존재하도록 할 의무.
담보로 맡긴 물건이 없어지거나, 가치가 훼손된다면 전당포는 그 역할을 유지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