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최인훈의 『광장』을 요즘 읽고 있다. 잘 쓰인 글은 서문부터 다르다. 읽으면서도 연필을 놓을 수 없다. 밑줄을 그어야 하므로. 한 문단을 읽기가 무섭게 표시를 하고 감탄한다. 몇 페이지 읽지 않았는데 흑연 자국 투성이다. 어떻게 이렇게 쓸 수가 있지. 미쳤다. 술을 안 마셨는데 취한다. 양귀자 작가의 『희망』중 「40세의 일기」를 읽을 때와 거의 비슷한 기분이다. 이쯤에서 발췌를 해야 마땅할지 모르나 생략한다. 리뷰를 쓰려고 한 건 아니니까.
이렇게 좋은 글을 읽고 다른 책을 읽으면 시시한 기분이 든다. 물론 그 외 소설들도 충분히 가치가 있고 감히 흉내내기 어렵다. 하지만 비교하기 싫어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초콜릿을 먹고 난 뒤 수박을 먹는 기분이랄까. 저세상 스윗을 알고 나면 안타깝게도 과일의 단맛은 느끼기 어렵다. 한동안 설탕을 끊어야 한다. 아니면 계속 초콜릿 같은 것만 먹거나. 그러고 보니 작년 여름, 김훈의 『허송세월』에 취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훈'자 돌림 작가들은 글을 다 잘 쓰는 건가. 이름을 바꿔야 하나. 피식.
아무튼, 술도 마시지 않고 취해있는데 메일 알람이 울렸다. 책이 판매되었으니 계산서를 발행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누군가 서점에 간다. 내 첫 책이 입고된 곳으로. 둘러보다 내 책을 발견한다. 견본을 훑어본 뒤 OPP비닐에 싸인 새 책을 집어 구매를 한다. 이런 상상을 하면 감사하고 뿌듯하다. 서툴지만 그동안의 내 노력을 어느 정도 인정받는 것 같아서. 짝꿍에게 자랑을 한다. 나 책 팔렸대! 요즘 읽기에 집중하느라 글쓰기에 게을렀다. 써야겠다. 이러려고 퇴사했는데. 열심히 써야지.
외출이 버거울 때가 있다. 웬만한 일들은 집안에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거의 모든 일은 의지의 문제이므로 집에 있으니 게을러져서 못한다는 건 핑계다. 하려면 뭐든 할 수 있다. 벌여놓은 일들을 다 쳐내지 못하는 건 정말 게으르다는 증거다. 그런데 위해 책상 앞에 앉으면 강아지가 낑낑댄다. 자꾸 자기 쪽으로 오라고 부르는 거다. 이불 위에서도 책도 읽고 글도 쓰고 공부도 하지만 깊은 몰입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 강아지를 쓰담쓰담해 준 뒤 랩탑을 열고 일을 시작해야 한다.
책상 위 스탠드와 랩탑을 켠다. 잔잔한 음악을 틀고 한글 파일을 연다. 지난 여행에서 적어둔 메모를 보며 조금씩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약 10만 자, 원고지 기준 500매, A4 기준으로 170페이지를 쓰는 게 목표다. 두세 시간쯤 지났다. 중심 내용 위주로 대략 써 보니 8페이지 정도 나왔는데, 목표 달성이 가능할까. 책의 판형도 고민했다. 띠지에 넣을 문구, 표지에 담을 그림과 색감등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수정한다. 내년 초에는, 아니 여름에는 샘플책이 나올 수 있을까. 채찍질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