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할 그릇은 제발 물에 담가줘

자라는 건 아이만이 아니다.

by 정벼리

아침에 집을 나서는 순서는 나이 순(?)이다. 가장 신새벽부터 아침을 맞는 것은 남편. 동이 트기 전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내와 아이를 깨우고 집을 나선다. 그다음은 나. 잠을 다 떨치지 못해 부은 눈으로 남편을 보내고, 아이가 한참 아침밥을 먹고 있을 때 이마에 뽀뽀를 쪽 남기고 현관문을 연다. 아이는 우리 부부가 각자 출근을 하고 한 시간가량 뒤에, 느긋하게 아침밥을 먹고 소파 위에서 책을 읽거나 강아지와 실컷 뒹군 뒤 학교로 향한다.


그래서 아이는 아침마다 스스로 식사 후 식탁을 치우는 미션을 수행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아이가 너무 착하고 기특하다는 칭찬을 쏟는다. 그리고 그 말 끝에는 때로 아이를 거저 키우는군요, 하는 감탄사가 따라붙기도 한다. 어허, 정말 모르는 말씀. 세상에 거저 크는 아이는 없다.


한동안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식탁 위에 그대로 방치된 밥그릇이 나를 반겼다. 처음에는 집에 혼자 남아 혼자 아침식사를 해야 하는 아이가 안쓰러워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저녁때 치우고는 했는데, 하루 이틀 며칠이 쌓이자 이건 아닌데 싶었다. 짠한 마음과는 별개로, 먹었으면 스스로 뒷정리를 하는 것도 배워야 한다. 언제까지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나는 좋은 말로 아이를 타일렀다.


"별이가 아침밥을 씩씩하게 잘 비우고 학교에 모습이 아주 대견해. 그렇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으면 스스로 먹은 그릇 정도는 싱크대에 치워야 하지 않을까? 별이가 그냥 두고 간 그릇에 음식물이 말라붙어서 저녁때 설거지하기가 너무 힘들어."
"앗, 엄마, 그것까지 생각 못했어. 내일부터는 치우고 갈게요."
"아유, 착한 우리 딸! 고마워."


그 뒤로도 몇 번 깜박하고 그릇을 내버려 둔 날들도 더러 있었지만, 이제 아침마다 그릇을 싱크대에 '옮겨놓는 수준'은 달성되었다. 이런 아이의 행보에 아주 조금 뿌듯하면서, 굉장히 많이 의아했다. 개수대에 그릇을 넣으면 물을 틀어서 그릇이 물에 담기게 해 두는 것은 상식 아닌가? 우리 아이는 그릇을 옮기기만 하고 물에 담가두지 않았다. 게다가 딱 그릇만 옮겨둘 뿐, 식탁은 닦아두지 않았다. 이제 그릇은 싱크대 안에서 말라갔고, 식탁은 식탁대로 말라갔다. 나는 여전히 퇴근하면 그릇을 불리고 식탁을 힘주어 닦으며 저녁을 맞이했다.


아이를 불러 다시 이야기했다. 이번엔 조금 쌀쌀맞아졌다.


"이게 뭐야. 식탁도 닦아야지. 네가 먹은 자리를 치우라는 건 그릇만 가져다 두라는 말이 아니잖아. 그리고 싱크대에 그릇을 넣었으면 물을 틀어놔야지. 개수대에 넣어놔도 물에 담가두지 않으면 말라붙는 건 똑같잖아."
"앗, 엄마, 거기까진 생각 못했어. 내일부터는 잘해볼게요."
"그래. 부탁할게."


그 뒤로 아이는 딴에 노력을 하긴 했지만, 영 어설펐다. 식탁도 닦아두고, 그릇에 물이 찰랑 담기게 해 두고 간 날도 더러는 있었다. 하지만 식탁은 닦았지만 그릇은 물에 담가두지 않았거나, 식탁을 닦는 시늉만 한 듯 행주자국대로 우유 얼룩이 식탁에 남아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매번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다 보니 점점 잔소리가 늘어났다. 이제 아이도 엄마가 퇴근 후 부엌에서 자신을 부르면, 내가 또 무엇을 대충 했나 주눅부터 들어있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식탁을 치우는 나에게 다가와 남편이 말했다.


"여보, 내가 부탁이 하나 있는데..."
"응, 뭔데?"


남편 손에는 수건이 하나 들려 있었다.


"아침에 머리 감고 화장대 옆에 수건 내버려 두는 습관 좀 고쳐주면 안 될까. 특히 요즘처럼 더울 땐 더 신경 써줬으면 해."
"아... 미안해. 아침마다 자꾸 깜박하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도 결혼 10년이 넘도록 여전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는걸. 수건을 집어다 빨래통에 넣기만 하면 되는 일도 여태 깜박깜박하는데, 적어도 우리 아이는 매일 까먹지 않고 치우려 노력하지 않았나. 처음으로 맡은 가사분담이니 당연히 어설플 수밖에. 나는 아직도 수건 하나 제때 못 치우는데, 아이에게만 완벽을 요구했구나 싶었다.


습관이라는 건 원래 이렇게 더디게 몸에 밴다. 몇 번 말한다고 바로 되는 게 아니라, 잔소리와 시행착오, 그리고 몇 번의 웃픈 해프닝이 합쳐져야 겨우 자리 잡는다. 그러니 좀 기다려줘야지. 아이는 그릇 치우는 법을 배우고, 나는 참는 법을 배우는 중인가 보다. 설령 오늘 저녁에도 그릇이 빼득빼득 마른 채 싱크대에 놓여 있어도, 화내지 말고 예쁘게 말해야지. 설거지할 그릇은 제발 물에 담가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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