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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호두랑 산책

비 맞으며 뛰어노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by 정벼리

갑자기 예고 없이 비가 쏟아진 날이었다. 나는 강아지 물품을 넣어둔 정리함을 열어 작은 비옷을 찾았다. 호두가 지금보다 훨씬 어려서 몸무게가 아직 1kg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사둔 것이었다. 무려 XS 사이즈로. 그걸 살 무렵의 호두는 몸집이 작아도 너무 작아서 맞는 옷을 찾기 힘들었다. 대부분의 S사이즈 옷도 헐렁하게 남아돌았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XS 사이즈 옷이 보이면 일단 사서 쟁여두고는 했다. 비옷도 나중에 요긴하게 쓰겠지 하며 장만해 둔 것이었다.


쨍하던 햇빛이 구름뒤로 쏙 숨어버리고 여우비가 쏟아지던 그날, 나는 오랜만에 휴가를 내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아이 학원 수업이 끝나갈 시간이 되어갈 때 즈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중 나갈 준비를 했다. 비 내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엄마를 발견한 아이가 얼마나 즐거워할지, 상상만으로 내가 더 행복해지는 기분이었다.


나갈 채비를 하는 나를 호두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똥강아지가 눈치는 얼마나 빠른지, 현관에서 우산을 꺼내자마자 따라 나와 낑낑대며 보챘다.


"너도 같이 나갈래?"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꺼내든 것이 XS 사이즈의 비옷이었다. 서랍 한 구석에 고이 모셔져 있던 비옷을 꺼내 호두에게 입히려 하는데, 이럴 수가, 너무 작았다. 그 사이 훌쩍 커버린 호두에 비옷은 길이도 짧고 품도 너무 꽉 끼는 것 같았다. 호두도 작은 옷이 답답한지,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걸 어쩌나 잠시 고민하다 비옷 입히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목욕할 때도 되어가고, 날도 후덥지근하니 비 좀 맞아도 별 탈은 없을 듯 싶었다. 빗속을 실컷 뛰어놀게 하고, 집에 돌아와서 목욕을 시키지 뭐. 호두와 나는 우산 하나만 달랑 챙긴 채 현관문을 나섰다.


하지만 호두는 뭐가 되었건 내 생각대로는 절대 움직여주지 않는다. 빗방울을 맞으며 활기차게 뛰어다니는 강아지는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것이었고, 현실의 호두는 아파트 1층 현관 앞에서부터 슬피 울며 내 다리에 제 몸을 비비고 파고들었다. 빗방울에 몸이 젖는 게 불편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슬픈 눈동자는 이렇게 소리치는 듯했다. 나 비 맞기 싫어! 결국 나는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호두를 안은 채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잠시 뒤, 버스에서 내린 아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엄마아, 호두야아, 소리치며 뛰어왔다. 호두는 아이를 보자마자 마치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어렵게 언니를 데리러 왔다는 듯 눈과 귀를 늘어뜨리고 히잉, 온갖 아양을 떨며 아이 품을 파고들었다. 아이도 큰 언니가 막냇동생을 어르듯, 쪼그리고 앉아 호두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어이구, 우리 호두가 언니 데리러 나오느라 고생했어요?"


비오는날산책.png 멍멍, 내가 언니 데리러 나왔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호두는 도무지 제 발로 걸으려고 하지 않았다. 찰방, 바닥에 고인 빗물이 발에 닿자 몸서리를 치며 안아달라고 울어댔다. 요놈의 똥강아지, 내가 호두를 향해 혀를 차니, 아이가 얼른 말했다.


"엄마, 나도 비 맞는 거 싫어. 호두 마음을 알 것 같아. 맨발에 빗물이 젖으니 얼마나 찝찝하겠어."


아이는 호두를 꼭 끌어안고, 제 강아지에게 빗물이라고는 한 방울도 닿지 않게 하려는 듯 우산을 호두 쪽으로 기울였다. 호두는 완벽하게 보호가 되고, 오히려 아이 어깨가 비에 젖어갔다. 투명 우산 아래서 둘만의 세계에 빠져든 듯 꼭 붙어있는 모습을 나는 한 발자국 뒤에서 따라가며 바라보았다. 어휴, 둘이 서로 저렇게나 좋을까.


그 뒤로도 여름을 나며 몇 번이나 호두와 빗속의 산책을 시도해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호두는 여전히 비 맞는 게 싫은 우아한 강아지다. 목욕도 잘하고, 물놀이도 곧잘 즐기면서 비 맞는 건 싫어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이상한 녀석이다.


바보야, 비 맞으며 뛰어노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그걸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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