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에 들어가기로 한 날이 밝았다. 창 밖은 고요함, 그리고 푸르름 그 자체였다. 하지만 배는 높은 파고로 오전 중에 출항이 중단되었다. 할 수 없이 오후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모슬포에는 송악도서관이 있어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가던 중 작은 분식집을 발견하고 아침을 먹었다. 작은 가게지만 따듯했다. 역시 나눔 귤도 있었다. 난로까지 있어 귤을 구워 먹는 신기한 경험도 할 수 있었다. 사장님들은 아이들이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게 너무 귀엽다며 예뻐하셨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배낭을 메고 여행을 하는 게 기특하다며 용기와 칭찬을 아낌없이 해주셔서 아침부터 아빠도 아이들도 기분이 좋았다.
하염없이 도서관에서 기다렸지만 출항할지 소식은 들리지 없었다. 답답했던 우리는 선착장에 가보기로 했다. 근처에서 고기국수로 점심을 먹고 선착장에 도착했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몇몇 사람들도 출항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 트레킹을 위해 가파도를 찾은 분들이었다.
가파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낮은 섬이라고 한다. 가파도에서 가장 높은 곳의 해발고도가 고작 20.5m. 가장 낮은 섬인 가파도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 한라산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태봉왓"이라는 캠핑장에서 꼭 하룻밤을 보내고 싶었다.
오후 두 시가 되자 터미널의 문이 열리고, 출항소식이 전해졌다. 어디에선가 관광버스들이 몰려들었다. 우리처럼 가파도행 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기다림 끝에 드디어 가파도에 들어가게 되었다. 설렘이 가득했다.
가파도는 정말 작은 섬이었다. 둘러보아도 높은 산은 없고, 작은 동산이 섬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저 멀리 하얀 눈이 쌓인 한라산이 보였다. 바람은 거셌지만, 가파도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가파도를 시계방향으로 돌아 '태봉왓 캠핑장'을 찾아 출발했다. 제주 방언으로 '왓'은 밭이라는 뜻인데 , 캠핑장 주인장 이름이 태봉 씨였다. 그래서 캠핑장 이름이 태봉왓, '태봉 씨의 밭'이 된 것이다. 우리는 오늘 태봉씨 밭에서 하루를 묵을 예정이다.
캠핑장에 도착했지만 주인아저씨는 없었다. 겨울인 데다 평일이라 손님이 없어 출타 중이라고 하셨다. 그렇지만 그 넓은 캠핑장을 우리 가족이 전세를 낸 듯 사용할 수 있었다. 마음에 드는 곳 어디든 터를 잡으라고 하셨다.
관리실에서 캠핑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둥근 조형물이 있었다. 주인 태봉씨가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인터넷 후기글에서나 보던 풍경을 실제로 눈앞에 두니 설레었다. 둥근 원 안에 보이는 한라산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넓은 캠핑장에는 데크 사이트와 잔디밭 사이트가 있었다. 데크 사이트는 한라산 대신 마라도를 조망할 수 있었다. 평평한 데크 위에서 자는 것도 좋지만, 우리는 한라산을 보러 왔기에 잔디밭 사이트에 자리를 잡았다.
성수기 주말이었다면 형형색색의 텐트들이 즐비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겠지만, 오늘은 그저 고요히 한라산을 바라볼 수 있어서 더 좋았다.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에 들어온 듯, 사진만 수십 장을 찍었다.
텐트 설치와 짐 정리를 마치니 아이들이 배가 고프다고 성화를 부렸다. 북쪽 끝 항구 근처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가파도 안에는 관광지다운 식당들도 여럿 있었지만, 초등학교나 보건소 같은 건물을 보니 '이곳도 누군가의 일상의 공간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불편할까? 물론 불편한 점도 많을 것이다. 섬 안의 섬이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적하고, 고요하고, 세상과 멀리 떨어진 평화가 있을 것 같았다.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서 섬에서 섬으로 배를 타고 나가야 하지만, 그 대신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과 시간의 느림이 존재하겠지. 물론 여행자의 시선에서 일뿐, 살아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큰일이 났다.
가는 식당마다 문이 닫혀 있었다. 마지막 보루였던 슈퍼마저 문이 굳건하게 닫혀있었다.
'영업 끝났다던 식당에 가서 부탁을 해볼까?'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사정을 얘기하고 밥을 좀 얻어먹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혼자 왔으면 한 끼쯤 굶을 수도 있겠지만, 아이들과 함께라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한 할머니께서 다가오셨다.
"무슨 일 있나?"
나의 사정을 말씀드리니, 옆에 밭에서 일하는 분을 불러와 슈퍼 문을 열어주셨다. 그러고는 슈퍼 주인과 연결해 주셨다. 구입할 품목을 사진으로 보내드리고, 계좌로 금액을 이체했다. 이번 여행의 진짜 은인을 만난 셈이었다.
가파도의 가게들은 주인이 보통 제주 본섬에서 산다고 한다. 그래서 오전에 출항이 되지 않으면 관광객이 많지 않아 아예 문을 열지 않는 때가 많다고 한다.
그런데 장 본 것을 들고 캠핑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둘째가 이가 아프다고 한다. 보니 앞니 하나가 거의 다 빠져 달랑거리고 있었다. 보건소에 가서 실이 있냐고 물으니 없다고 했다. 대신 지혈용 거즈를 주셨다. 돌아오는 길에 벽돌을 쌓고 있는 곳에서 조적용 줄이 굴러다니는 걸 보고 그 줄을 챙겼다.
캠핑장에 돌아와 아이와 상이 끝에, 이를 먼저 뽑으면 밥 먹기가 불편할 것 같아 컵라면과 햇반으로 간단히 끼니를 해결했다. 그리고 조적용 줄을 이용해 둘째 앞니를 뽑아주었다.
웃지 못할 해피닝이 불과 한두 시간 사이에 연달아 일어났다. 진이 다 빠졌다. 그래도 쫄쫄 굶고 하루를 보낼 수도 있었는데, 할머님 덕분에 식사 걱정을 덜었고, 또 둘째 이가 흔들리는 긴급 상황까지 겪으며 우리 부자의 정은 더 깊어졌다.
오늘도 텐트는 바람에 흔들린다. 펄럭거리기도 하고, 핀이 빠져 날아가지는 않을까 걱정도 됐다. 그래도 이 텐트가 우리의 포근한 보금자리임을 안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끄떡없이 우리를 지켜줄 거라는 걸. 앞으로도 그래왔으니까.
그렇게 가파도에서 밤이 깊어갔다. 아이들은 일찍 잠이 들었고, 나도 같이 잠이 들었다. 하지만 자정이 되기 전, 심한 한기에 등이 시려 잠에서 깨어났다.
과연 오늘 밤, 무사히 잘 잘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