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비가 왔다. 새벽 내내 달갑지 않은 빗소리를 들어야 했다. 평소라면 텐트 안에서 빗소리를 듣는 것을 정말 좋아했게만 오늘만큼은 아니다. 텐트를 정리해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하는 우리에게는 불청객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아침이 되니 빗소리는 잦아들었고, 텐트에서 나설 땐 하늘도 점점 개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오늘 아침도 표선해수욕장 모래사장으로 모험을 떠났다. 다시 봐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표선해수욕장이다. 파도가 만들어낸 물결뿐이었던 백사장은 아이들의 발자국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이런 들판이 집이자 놀이터가 되어준 것이 감사하다. 다른 놀잇감을 찾지 않고 주변에서 즐거움을 찾아내는 아이들도 신기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했다.
나는 텐트 내부를 정리한 뒤, 텐트는 햇빛에 조금 더 말리기로 했다. 시간이 남아 어제 들렸던 표선도서관에서 그림책을 보며 텐트가 마르기를 기다렸다.
오늘의 목적지는 대정읍에 있는 가파도였다. 하지만 어제와 오늘, 날씨가 좋지 않아 배가 뜰지 알 수 없었다. 일단 모슬포를 향해 버스를 탔다. 이번 배낭여행 일정 중 하루만큼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즐길 거리를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카트를 타고 싶었지만, 아직 아이들이 어려 단독으로 운행이 불가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미니 ATV였다. 그리고 근처에서 열리는 서커스를 보기로 했다.
그런데 버스 편을 알아보다 보니 세 번이나 버스를 갈아타야 했고, ATV 타는 곳과 서커스 공연장까지 인도 없는 길을 걸어야만 했다. 버스는 동광육거리에서 우리를 내려줬다. 근처에 뷔페식으로 된 기사식당이 있어 아이들과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혹시나 싶어 ATV 타는 업체에 전화를 해보니, 식당 바로 옆 주유소에서 주유 중이라는 게 아닌가! 우리는 허겁지겁 밥을 먹고 사장님의 차를 얻어 타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아니었으면 인도 없는 차도를 30분이나 걸었야 했다.
깡통열차도 타고, 말에게 당근도 먹이로 주는 체험을 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ATV를 탔다.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 작아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힘이 좋고 속도가 꽤 빨랐다. 첫째는 금방 적응을 했지만, 매사 조심스러운 둘째는 익히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러면서 자신감이 없는지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짜증이 났다. 그러는 중 둘째가 브레이크를 밟지 못해 나무에 부딪히고 말았다.
"브레이크 밟으라고 했잖아!"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화를 내었다. 아차 싶었다. 둘째는 감정이 매우 예민한 편이라, 그대로 몸이 얼어붙어 울상이 되어버렸다.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바로 옆에 붙어 다니며 무사히 ATV 체험을 마치게 되었다.
다음의 일이지만, 첫째는 제주 배낭여행에서 가장 즐거웠던 일로 ATV 체험을 꼽았다. 그리고 둘째는 제주 배낭여행에서 가장 재미없던 일로 ATV 체험을 꼽았다.
너무 후회스럽고, 둘째에게 미안했다. 항상 기다려주고 차분하지 못한 아빠라서 말이다.
서커스장까지 1km가 채 되지 않는 길을 걸었다. 인도가 없는 찻길이라 조심스러웠다. 이런 곳에 도보 여행자가 많을 리가 없다. 버스나 트럭 같은 큰 차들도 제법 지나다녔다. 차들이 지날 때마다 내 몸이 흔들릴 정도로 섬뜩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둘째가 또랑에 빠질 뻔도 했다. 다행히 다치지 않았고, 그 덕분에 실컷 웃을 수 있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아찔하기 그지없다. 아이들 배낭에 야광 표식이라도 붙여두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서커스는 하루에 세 번 정도 공연을 하는데 공연 시간이 되니 어디서 왔는지 관광버스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많았던 것만큼 볼거리도 많았다. 특히 마지막에 큰 원통 안에서 여러 대의 오토바이가 서로 뒤섞여 묘기를 부렸는데, 아이들도 나도 숨을 죽이고 보았다. 모두가 오늘의 하이라이트로 꼽을 만한 순간이었다.
가파도에 들어가는 배는 높은 파고로 인해 오늘은 운항이 중단되었다. 우도에 이어 두 번째 입도가 막혀 아쉬웠다. 하지만 아이들은 너무 신나 했다. 왜냐하면, 야영지가 사라진 우리에게 선택지는 호텔뿐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캐니 모슬포라는 저렴한 호텔에서 뷰 좋은 방을 얻어, 그동안의 여독을 풀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년 전 가족여행으로 들렀던 모슬포에 "항구식당"을 다시 찾았다. 늘 겨울이면 대방어 생각에 떠올리던 식당이었다. 아내는 그 당시 처음 맛본 대방어 때문에 만취했었고, 그래서 항구식당은 우리 가족의 전설의 식당이 되어버렸다.
아이들이 회를 먹긴 하지만 즐겨 먹지는 않았다. 그래서 주문을 할 때도 포장 여부를 여쭤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초밥을 만들어 먹으라고 밥을 따로 주셨는데, 세 번이나 리필해야 할 정도였다. 아이들이 맛있게 먹으니 나의 젓가락질도 자연 느려졌다. 때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아이들이 좋아하면 왠지 모를 경계심이 생기기도 하지만, 가족의 애정하는 메뉴가 늘어나는 것이니 반기지 않을 수가 없다.
식당을 찾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건 당연히 맛이다. 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집이라도 친절하지 않으면 발길이 닿지 않는다. 불친절함이 맛을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반대로 맛은 조금 밋밋하더라도 친절한 식당이라면 그 맛은 더 빛난다. 그런데 이 항구식당은 맛도, 친절도 최상급이다. 우리 가족 제주 맛집 1번지다.
텐트가 아님에 신이 난 아이들의 흥분을 가라앉히느라 애를 먹었다. 이런 모습을 보며, 괜히 아이들을 이 추운 날씨에 고생시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맞는 말이기도 하다. 나 역시 그런 여정을 의도했으니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중간중간 이렇게 쉬어갈 수 있으니 내일 더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내일은 가파도에 들어갈 예정이다. 하지만 내일도 바람이 거세다.
과연 섬 속의 섬으로의 향하는 우리 여정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