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날 아침이 밝았다. 새벽 내내 나를 괴롭혔던 한기의 원인은 매트 때문이었다. 구멍이 났는지 한 시간이면 바람이 모두 빠져버렸다. 바람을 넣었다가 빠지고, 다시 넣었다가 깨는 일을 반복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곤히 잘 자주어 감사할 뿐이다.
하룻밤을 보냈을 뿐인데, 태봉왓은 어느새 익숙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아빠인 나는 아이들 뒤로 펼쳐진 한라산과 산방산의 경치에 감탄하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바닥에 뒹구는 돌멩이들을 뒤적이며 '멋진 돌'을 찾는 데만 몰두했다. 나에겐 그저 손을 더럽히는 돌멩이일 뿐이지만, 아이들에겐 세상에서 하나뿐인 보물이었다.
아이들 눈엔 저 멀리 웅장한 산들도 단지 '조금 큰 산', '어디에나 있을 법한 산'일뿐일지도 모른다.
결국 태봉씨의 얼굴은 끝내 보지 못했다. 대신 우리는 태봉씨의 밭에 인사를 남기고 길을 나섰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듯 어둑한 아침, 오늘은 제주시로 향한다. 원래는 협재해수욕장에서 야영을 할 계획이었지만, 구멍 난 매트 때문에 계획을 바꿨다.
한림에서 점심도 먹고 해수풀도서관에도 들르려 버스를 탔다. 그런데 원래 가려 했던 유명한 뷔페집이 문을 닫아버렸다. 아이들에게 오랜만에 양껏 맛있는 것을 먹자며 호언장담을 했는데 아이들의 아쉬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농협 건물 옆에서 호떡을 굽던 청년 두 명이 아이들을 불러 세웠다.
"얘들아, 너네 배낭 여행하고 있니? 이리 와봐."
그들은 형제였고, 어릴 적 자신들의 모습이 떠오른다며 호떡을 하나씩 쥐여주었다. 내 몫까지 세 개.
"무사히 완주하세요!"
손에 닿은 호떡보다 마음이 더 따뜻했다. 돈을 건네려 했지만, 그들은 손사래를 쳤다. 응원이 그들의 인사였다. 그 호떡의 달콤함과 고마움은 아직도 입안에 남아 있다.
해수풀 도서관에서 피자로 점심을 먹고 그림책을 읽었다. 매일 도서관을 들르니 아내에게도 면이서고 아이들도 습관적으로 책을 읽게 되어 좋다. 가끔은 검색할 것도 많아 몰래 휴대폰을 들여다보지만, 아이들에게 들키면 바로 잔소리가 쏟아진다.
"아빠! 또 핸드폰 해!"
오후에는 올레바당 체험마을로 향했다. 항구 한편에 양식장처럼 그물 속에 물고기들을 가두어 낚시 체험을 하는 곳이었다. 새우와 지렁이를 미끼로 이용해 낚시 바늘을 내리면, 그물 안의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낚여 올라온다. 그러면 다시 풀어주는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실제 물고기를 잡아 올린 다는 것이 신기했지만, 날카로운 바늘을 뺄 때마다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물고기를 보며 망설이게 되었다. 그리고 물고기가 잘 잡히지 않으면 미끼를 한 움큼 뿌렸다. 그러면 물고기들은 미친 듯이 모여들었고, 그때 낚싯바늘을 들어 올리라 했다. 그러다 한 물고기가 잡혀왔는데 그 물고기는 바늘이 눈꺼풀에 꿰어 올라오기까지 했다. 상처 투성이인 배가 고픈 물고기들이 자꾸만 걸려 올라왔다.
"그만할까..."라는 생각이 들 무렵, 아이들은 "더 큰 거 잡을 거야!" 하며 능숙하게 미끼를 꿔고 있었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과 물고기의 고통 사이에서 마음이 복잡했다.
갑자기 빗방울이 굵어져 낚시체험을 서둘러 마쳤다. 제주시로 가기 위해 조금 걸어야 했다. 바닷가 시골 마을을 걷고 있는데 내가 고기 먹을 때 쌈 싸 먹기 좋아하는 케일이 눈에 띄었다. 아이들에게 자랑도 하고 알려줄 겸 퀴즈를 냈다.
"옆에 무슨 밭이게~?"
"음... 브로콜리잖아!"
"응?!"
"잘 봐. 가운데 브로콜리 있잖아!"
나는 윤기 흐르는 잎만 보고 당연히 케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진짜 케일을 밭에서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큰 잎사귀 사이에 숨어있는 브로콜리를 용케도 발견한 것이었다.
담벼락 위로 빼꼼 고개를 내민 강아지도 있고, 보행기를 밀고 지나가는 꼬부랑 할머니가 손을 흔든다. 비 냄새와 함께 스며드는 시골의 정겨움에 마음이 편해졌다.
제주시로 향하는 버스를 탔는데 사람이 가득 차 있었다. 하교시간이 겹쳐 학생들도 많았다. 우리는 큰 배낭을 메고 있어 사람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아이들 앉을자리가 없어 두리번 자리를 살폈지만 자리가 없었다. 당연한 건 아니지만 아이들에게 양보해 줄 사람은 없을까 둘러봤지만 다들 핸드폰을 한다고 주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한 시간을 꼼짝없이 서서 가야 했다. 그 시간 동안 아이들이 한마디 투정 없이 버텨준 게 고마웠다.
드디어 호텔에 도착했다. 어제 추운 텐트와는 달리, 오늘의 침대는 궁궐 같았다. 아이들은 신이 났고, 나도 마음이 놓였다.
"매트에 펑크가 나길 잘했네." 농담처럼 중얼거렸다.
저녁엔 흑돼지 거리를 거닐며 고기도 구워 먹고, 동문시장 야시장 구경도 했다. 그리고 여행 첫날부터 약속했던 기념품도 샀다.
첫째는 바로 스노우볼을 골랐지만, 둘째는 무려 한 시간을 고민했다. 가게를 오가며 유리잔을 들여다보고, 볼펜도 만지작거리고, 물시계도 만지작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빨리 골라!" 했겠지만, 오늘은 그저 기다려주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지금도 눈가에 선하다.
결국 첫째는 스노우볼, 둘째는 물시계를 선택했다. 아빠로서는 '제주스러운 기념품'을 샀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그건 내 욕심이었다.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간다. 12시 비행기를 타기 전, 숙소 근처에서 소소히 산책을 할 예정이다. 고깃집에도 가고, 야시장 구경에 기념품까지 오랜만에 즐기는 여행다운 여행에 괜스레 아이들에게 미안함이 느껴졌다. 남들 차 탈 때, 배낭 메고 버스를 기다리고, 따듯한 욕조에 푹신한 침대가 아닌 땅바닥, 찬 기운을 막아준 텐트 두 겹이 전부인 곳에서 재웠으니 말이다. 아무리 제주라지만 한겨울인 지금 괜한 사서 고생을 시킨 것은 아닐까.
하지만 오늘 밤, 투정 한 번 없이 따라와 준 아이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그래, 이런 여행이라서 더 오래 기억에 남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