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개나 소나입니다.<자기소개글>
음악을 한다고 다 음악인일까? 나는 지금도 음악을 만들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할 생각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음악인'일까? 아니면, 더 많은 청중이 생기거나, 돈을 벌게 될 때 비로소 음악인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어릴 때 음악은 내 특기였다.
초등학교 5학년까지 학원을 다녔지만, 집안 수입이 일정하지 않아 학원비를 내지 못해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내 변덕도 있었다. 때로는 내 의지가 아니라 학원 선생의 괴롭힘 때문에 덩달아 피아노가 싫어지기도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아마도 2~3학년? 말할 때마다 매번 달라진다.)부터 5학년까지 학원을 다녔음에도, 내 피아노교본의 기록은 체르니 100의 첫 장을 넘기지 못했다.
중학교 때는 플루트를 배웠다.
그 비싼 악기를 부모님이 중고로 구해주셨지만, 함께 배우던 친구의 플루트 색깔과 내 것의 색이 달라 꺼내기가 싫었다.
녹슬고, 어딘가는 음이 새는 플루트. 광을 내보려 악기를 물로 닦아본 적도 있다.
마음속엔 늘 음악이 있었지만 배우지 않았다. 언젠가 용기 내어, "음악을 하고 싶다"라고 형제인 스님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
스님은 "그럼 학원을 다녀"라고 했지만, 답답했다.
왜 답답한지 몰랐다. 그 말이 틀린 건 아닌데, 그렇다고 맞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내가 영감을 얻는 방법은, 다른 예술가들처럼 자연에게서 오는 압도감이나 몇 번을 곱씹게 되는 어느 문학작품의 한 문장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내 영감은 저작권 없는 반복 음원들을 모아둔 사이트, 스플라이스에서 온다.
드럼은 자동 연주 기능으로 리듬을 뽑고, 코드는 스플라이스에서 통째로 가져오거나, GPT에게 짜달라고 한다.
정말 '야매'스럽게 음악을 만든다.
예전엔 진짜 연주처럼 보이기 위해 타격 위치에 따른 샘플을 섞고, 디테일을 다듬고, 온갖 노가다를 감행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어떤 프로듀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과정이 어떻든, 듣기만 좋으면 된다.
소흐님은 디자인을 하시니 잘 아시지 않나, 레이어가 엉망이어서 불편한 건 제작자 본인 밖에 없다.
사람들은 제작과정을 상상하지 않는다.
결과물로 판단할 뿐... 그렇게 시간과 노력을 아꼈다.
자기 계발서에는 언제나 '성공'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에게 성공이란,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어릴 적엔 남들보다 빨리 배우고 재능 있는 '돈 많은 천재'의 이미지를 떠올렸던 것 같다.
어릴 적의 나는, 멋지게 노래하고 악기를 다루는 음악인을 꿈꿨지만,
지금의 나는 음원 샘플 사이트를 뒤적이며 표절에 가까운 작업을 반복하고 있다.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쓰던 나는, 내가 음악에 큰 재능이 없다는 것과 유명인들처럼 매력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우울해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이 너무 컸다.
나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실패를 선택했다.
스스로를 '음악을 하고 싶은 사람'으로만 규정하며 멀어져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사회분위기나 집안의 주머니 사정을 계산해야 하는 상황,
무엇보다 타인과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의 궤도에 올라있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이었던 것 같다.
스스로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문을 하고 있으니, 스님은 제대로 현답을 해준 셈이다.
나는 늘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다.
그래서 자주 한눈을 판다. 한국인은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것에 시간을 더 투자한다고 한다.
그게 바로 나다...
하고 싶은 것은 너무도 많지만,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은 없다.
나는 일단 손을 대면 평타 이상으로 잘 해낸다.
수박을 구석구석 아주 잘 핥는 '수박 겉핥기 전문가'다.
그러나 더 깊이, 전문가의 영역에 발 들이려고 하면 언제나 '기초'라는 것이 '전문가의 문' 앞에서 내 발목을 잡는다.
나는 크게 노력하지 않고도 일정 수준에 빠르게 도달하는 능력을 가졌고, 그럴싸하게 흉내 내는 데 능숙하다.
빠른 길을 찾아, 이리저리 차선을 변경해 남들보다 몇 미터는 더 앞서 나가지만, 결국 마지막에 내가 섰던 차선은 '나가는 길' 차선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평생 쪼들려도 돈 걱정을 심각하게 하지는 않았다.
최소한 밥은 먹고살았고 카드빚이 연체가 되어 기록에 남아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건 타고난 건지, 돈에 대한 개념이 없는 건지 잘 모르겠다.
디자인을 업으로 삼고 있다.
이름에서 괜히 멋있어 보이는 직업이지만, 밤샘이 잦고 건당 비용을 받다 보니 시급으로 환산하면 최저임금의 절반도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이 일로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선 더 많은 시간을 갈아 넣어야만 한다.
업계에서 오래 일했지만, 나를 '전문가'라 부르기엔 마음이 찜찜하다.
이 일을 진심으로 대하지 않았기에, 그 시간에 다른 것들에 기웃거릴 에너지(혹은 욕구불만)가 있던 건지도 모르겠다.
고객들도 그 미지근한 태도를 눈치챘을 것이다.
돌아서버린 마음에는 딱히 미련을 갖지 않았다.
음악을 업으로 삼으려고 보니, 돈이 필요하다는 현실을 마주하게 됐다.
그동안은 대가리꽃밭(갑툭 죄송...)이어서 돈과 음악은 별개라고 생각했다.
음악을 하려면 악기나 장비에도 돈이 드는 건 당연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을 몰랐다.
음악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고, 시간을 확보하려면 경제적 여유가 필수였다.
일하지 않는 시간을 쪼개 야금야금 작업하는 일이 무척 번거로웠다.
디자인 일까지 병행하려니, 에너지 소모가 심했다.
하루 한 곡을 만드는 챌린지를 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간단한 작업이라고 생각했지만, 스케치만 하는 데에도 하루 평균 다섯 시간이 걸렸다.
결국, 음악을 지속적으로 만들려면 단순한 열정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걸 실감했다.
시간을 확보하려면, 노동으로만 돈을 버는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경제지식이 있어야 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다.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 내 생애 동안 절대 없을 줄 알았던 회계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다, 나의 ADD 성향도 알게 됐다... 근데, 요즘 들어 디자인일도 너무 재밌다ㅠㅠ)
'열 재주 가진 놈이 굶어 죽는다'는 말이 요즘 들어, 와닿는다.
특출 난 장기가 없다는 건, 노력한 적 없다는 증거다.
미생의 장그래 대사가 떠올랐다.
'내 노력은 쌔삥', 노력의 양도, 질도 없던 나는 더 이상 젊음의 매력만으로 어필할 수 없는 나이에 들어서자, 분주해졌다.
그저 남들보다 감각이 조금 빠르고, 흉내는 빨리 냈지만, 그건 실력도 아니고, 꾸준함도 아니었다.
지난 5년간, 음악, 글쓰기, 명상, 디자인, 영어, 회계...
온갖 것들을 붙들고 흔들었다. 딱히 실속은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해본 노력에 매일 넉다운되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엔, 흩어지는 게 아니라 쌓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음악을 하고 싶은 사람'에서 '음악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음악을 놓지 않기 위해 '음악인'이라는 정체성을 만들고 최면을 걸었다.
그렇지만, 나도 솔직히 양심은 있어서 '야매'라는 단어를 붙여야만 했다.
'야매'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는 단순히 스플라이스로 음악을 만들기 때문이 아니다.
스플라이스나 지피티가 아니면 음악을 제대로 만들어낼 수 없는 상태, 본인이 원하는 소리를 자유자재로 낼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와 효율적인 제작 방식은 별개의 것이다.
어떤 화가의 단순하거나 괴상한 그림은 완벽한 기초위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
물론 계속 스플라이스로만 음악을 만든다면 내 실력은 정체되겠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완벽한 실력보다 지속적으로 음악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효율적 제작 방식에 익숙해진 나는, 이 딜레마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지 고민하면 막막해진다.
그래도 결국 원하는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공부를 할 수밖에 없겠지.
결국 기초! 그래, 그거다. 내가 노력하지 않았고, 매번 포기하게 만든 것은 '기초'라는 놈이었다.
이제 '나가는 길' 차선위를 달리게 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평가에 대한 두려움을 감수하기로 했다.
그 점에서 미리 위로를 받는다.
지금은 음악 제작 방식이 빠르게 변화하는 과도기에 있다.
아니, 음악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게 그렇다.
컴퓨터 음악은 이미 오래전에 자리 잡았지만, 이제는 'AI'라는 새로운 흐름.
음악을 하는 사람의 역할이 점점 바뀌고 있다.
예전엔 사람이 직접 해야 했던 일들이 지금은 버튼 몇 개만 누르면 된다.
내가 원하는 소리를 직접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어떤 게 가장 잘 어울리는지를 고르는 사람이 되는 것 같다.
정통적인 음악 제작자에서 큐레이터로, 그 역할이 조금씩 이동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더 당당히 야매 음악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아예 '야매'라는 말이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음악을 듣는 즐거움 중 하나는 다음 음이 어디로 이어질지 예상하는 순간, 혹은 예상치 못한 흐름에서 의외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뻔한 음악은 편안함을 느끼고, 뻔하지 않은 음악은 벅차다.
'뻔하지 않은 음'이란 화성학적 기초 위에서 조화를 이루는 음을 의미한다.
불협화음뒤에 반드시 본래의 코드로 돌아가 주어야만 불안한 음이 해소가 되듯이, 이미 짜인 각본 안에서 우리는 경우의 수를 찾고 있는 것뿐이지 않은가?
우리가 감동받는 멜로디의 경우의 수는 한정적이다.
멜로디도 중요하지만, 메시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잠시 음악공부를 미뤄두고 올해의 '한 가지에 집중하기'(원씽/게리 W. 켈러의 책)를 글쓰기로 정했다.
음악을 하려면 사유가 필요하고, 사유를 정리하려면 글쓰기가 필수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돈도 필요하다.
변덕이 심해서 또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지만, 당분간은 음악인의 신분을 야매로 유지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