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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를 치고 있습니다. 여기는 영어공부방인데요.

마흔이지만 이제 다섯 살인 걸로…

by 소흐

우울의 이유

스물 중반에 만났던 전 애인의 성별불쾌감은 조울증과 공황을 동반했다.

그에겐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갈 곳이 없어, 내가 살던 작은 아파트에 머물게 되었다.

나 역시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같은 이유로 힘들었다. 그럼에도 서로 의지가 될 거라 믿었다.

나는 극복할 의지가 있었지만, 단 하루도 행복하지 않은 그의 일상에 내가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는 대체로 조용히 우울의 늪에 빠져 있었고 이따금 울고불고 히스테리를 부렸다.

매주 호르몬 주사를 맞은 다음 날이면 우울이 극에 달했다.

거의 1년 반 동안 집 안에 틀어박혀 영화와 게임으로 시간을 보냈다.


음악을 좋아하던 친구였기에 밴드를 하고 싶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직장인 밴드 모임까지 알아봐 주었다.

그를 좋아했지만, 내 삶은 점점 더 지쳐갔다.

나는 그의 삶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내겐 내 삶이 필요했다. 조금씩 거리를 두었고, 몇 달 뒤 그는, 원래 살던 지역으로 돌아갔다.


만났던 2년 동안 나는 완전히 소진되었다.

무기력은 더욱 심해졌고,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집착도 짙어졌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싫어졌다.

친한 친구 한 명과 가족 외에는 모든 관계를 끊고 살았다.

먹고는 살아야 했기에 매일 사무실에 출근은 했지만, 업무는 문자나 이메일로 처리했다.

전화가 울리면 심호흡을 여러 번 한 뒤에야 받을 수 있었다.


나를 책임져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완전한 히키코모리가 될 수는 없었다.

사람들과 만나 극복해 보려던 적도 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나도 자존감이 이미 바닥인데,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나는 점점 더 깊이 숨어들었다.

사람에게 순간은 흥미를 느껴도, 어떤 사람인지 파악되는 순간 금세 관심을 잃었다.

단점만 찾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좁은 아파트를 벗어나고 싶었다.

고양이들이 조금 더 자유롭게 뛰놀 수 있는 공간을 주고 싶었다.

혼자서는 무리였고 절친과 함께 집을 보러 다녔다. 그리고 마당이 넓은 전원주택으로 이사했다.

옆, 아래, 위층에 사람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간간이 참견하는 일부 주민을 제외하곤 정말 평온했다.

층간 소음에 시달리던 아파트를 벗어나 시골의 공기를 마시니 해방감이 몰려왔다.

그러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다.

일이 줄어 걱정은 됐지만, 사람을 직접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재택근무를 하는 동안 내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당시 불교학과를 다니던 스님에게 명상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가 마음을 접었다.

스님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깊이 공부하지 못했다 하셨고, 나는 괜한 부담을 주기 싫었다.

변화하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단순히 비관적인 생각을 떨쳐내는 걸로는 부족했다.

무기력과 냉소의 삶에서, 활기차고 행복한 삶으로 건너가는 다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변화를 바라는 마음이 계속되자, 어느 날,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깨달음'이 찾아왔다.


'나는 나이지만, 내가 아니기도 하다'는 자각.

그저 태어났고, 그 탄생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

어떤 감정이나 사건도, 우리가 의미를 부여할 때에만 의미가 생긴다는 사실.

그동안 내 감정은 내가 아니라 타인의 기준을 따라 판단된 것들이었다.

나는 내 기준이 없었다.

감정조차 타인의 시선에서 내린 평가였다.

한 발 물러서야 했다. 마치 장기판의 관전자처럼, 내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오래 숨어 있었지만, 사실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었다.

'인생은 혼자'라는 깨달음은, 냉소가 아니라, 온전히 감각을 느끼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존재가 '나'라는 자각이었다.

내 말과 생각은 수많은 타인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을 조합해 살아가는 건 '나'였다.

그때부터 조금씩, 사람다워져 갔다.

완전히 무너진 집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새로 짓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애증의 영어공부

어느 날 웹서핑 중에 영어 강의 광고를 봤다.

늘 영어를 배우고 싶었다.

혼자 공부하면 몇 달을 못 갔다. 항상 금방 포기했다.

결국 그만둘 거라는 걸 알면서도, '돈을 쓰면 더 잘하게 되겠지'라는 이상한 논리로 수강을 결제했다.

처음엔 그저 반복되는 실패의 연장선을 잠시 잊었던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강의를 듣다 보니, 선생님이 직접 댓글을 달아줬다.

유명한 강사가 학생 하나하나에게 친근하게 반응하는 모습은 의외였다.

어느 날, 오픈채팅방이 생겼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용기를 내어 들어갔다.


스물몇 명 남짓한 소규모 채팅방.

오랜만의 낯선 대화, 어색함과 긴장으로 손끝이 차가워졌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은 시간이 너무 길었다.

말하는 법조차 잊었다.


내 말은 조각난 단어들의 나열처럼 들렸다.
절친은 내 말을 맥락으로 이해해줬지만, 후에 말하길 조현병 같았다고 했다.
소통은 훈련이 필요했다.

지금도 말이 어색할 때가 있지만, 이제는 생각을 정리한 뒤 차분히 말할 수 있게 됐다.
글도 마찬가지였다.
문장 하나를 몇 번이고 고쳐 써야 겨우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톡방에는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수백 명을 넘는 규모가 되었다.

늘 우울하고 무거운 주제, 차별, 가족 문제, 자살 소식 같은 이야기만 듣다가 활기차고 학구열 넘치는 대화들을 마주하니, 다른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처럼, 문을 열었더니 이(異) 세계였다.

처음에는 적응이 쉽지 않았다.

모두가 뭘 그렇게 사랑하고 행복하다고 말들을 하는지, 선생님을 교주처럼 떠받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대화에 익숙해져 갔다. 이상했다.

사랑한다니까 내 안에도 사랑이 느껴졌다.

행복하다니, 나도 행복한 것 같았다.

서로 으쌰으쌰 하여 공부하기 위해 만든 톡방이었지만, 내가 얻어간 건 이보다 더 큰 것이었다.

타인의 행복을 보며 나도 행복을 느끼다니...

생각해 보면, 불행한 사람들 곁에 있던 내가 불행했던 것도 같은 이치였겠구나.

행복은 참 단순한 것이었다.


기타를 치고 있습니다. 영어공부방인데요.

톡방에는 과제제출용으로 음성이나 영상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러던 중 영어로 된 노래(Bill Withers-Lean on Me)의 가사를 해석하고 공유하는 미션이 진행되었다.

몇 달 전 충동적으로 샀던 기타를 꺼냈다.

평소 정말 좋아하던 곡이어서 백 번쯤 연습한 후 녹음해 올렸다.


선생님의 첫 반응은, "소흐님, 기타 치세요?"였다. 순간 고민했다.

기타를 친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코드 몇 개만 잡아요. 기타를 치는 건 아니에요."라고 해야 할까?

지금은 건반을 맡고 있으니, 사실 건반을 한다고 말해야 할까?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스쳤지만, 결국 뭐라고 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예상보다 따뜻한 반응이 돌아왔다.


이후에 선생님도 자극이 되었는지 직접 노래를 녹음해 올리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림을 올리고, 랩을 녹음하고, 칼림바를 연주했다.

영어 공부하는 방에서 이런 걸 하고 있다니, 좀 오글거리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설레기도 했다.

하루에도 수백 개의 톡이 쏟아졌다.

카톡으로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나로서는 집중이 안 되어 일을 제때 못 끝내기도 했다.

그래도 좋았다. 그렇게 이 공간은 영어와 더불어 문화 공유방으로 점차 변해갔다.


500명이 넘는 공부방에서, 새로 온 사람들을 안내하며 이따금 노랠 불렀다.

스태프를 같은 위치를 자처하며 오래 이곳을 지켜나갔다.




어느 비 오던 날, 그 풍경은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이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내 어휘가 오늘만은 답답하지 않았다.

아마 누구도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는 그대로 풍경을 감상했을 거다.


눈앞에는 온통 회색빛 도로와 빗방울이 어렸다.

그리고 기타를 들었다.

김광석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반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이제는 부끄러움도 없어진 걸까.

아니면 500명이 넘는 이 톡방에서 모두가 친해졌다고 착각했던 걸까.

따로 용기를 낸 것도 아니었는데, 자연스럽게 노래를 올렸다.

그리고 새로 들어온 학생이었던 것 같은데, 어떤 반응이 돌아왔다.

"이거 본인인가요?" 이 한마디를 시작으로 신상을 묻는 질문이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관심에 숨이 막혔다.

이런 경험은 중학생 때 쫓아다니던 후배들 이후로-_- 처음이었다.

그날의 카톡을 캡처해 보관해 두었다.


어쩌면 그냥 훅 던지고 지나가는 말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이 말들은, '배고픈 사람에게 식사'같은, '아픈 사람에게 약'같은, 아주 당연한 것이 결핍된 이의 생존욕구에 필요한 말들이었다.


노래 미션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나를 기다려주었다.

누군가는 내 영상을 자기 인스타에 올려도 되겠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대충 이때쯤엔) 700명을 상대로 몰래카메라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아... 내게 매력이 있었구나. 내 목소리가 듣기 나쁘지 않았구나. 그래서 그렇게 잘생기고 예쁜 애들이 사귀자고 했었.... '




명상

그즈음, 선생님은 내게 개인톡을 자주 보냈다.

본인이 대학원에서 명상을 공부하고 있다며, 자신이 쓴 리포트의 피드백을 요청했다.

나는 진심을 담아 답장을 보냈고, 추진력이 엄청났던 선생님은 즉시 내게 함께 명상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처음엔 다섯 명이서 시범 삼아 하브루타를 해본 후, 본격적인 명상 강의를 열고 싶다고 했다.


막연히 '명상을 하면 좀 나아질까?'라는 생각만 몇 년 동안 했다. 그동안 간절했으나, 실행하지 않았던 일이다.

누군가가 마치 답답하다는 듯 멱살을 잡고 명상 앞에 날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첫 명상 줌(Zoom)

일요일 아침 10시에 열린 줌, 막 샤워를 하고 나온 상태, 목이 잔뜩 늘어난 검은 티셔츠, 초췌한 몰골 때문에 카메라를 켜고 싶지 않았던 부끄러움, 화면에 떠있는 내 모습을 보며 100번은 신경을 썼던 순간, 그리고 더웠던 그날의 온도마저 생생히 기억한다.

그날, 선생님은 내게 노래를 부탁했다.

예상하지 못한 요청이었지만 예전보다는 차분하게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내가 고른 곡은 '곰팡이꽃'의 'Someday'.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부르는 노래, 지금은 부끄럽고 초라할지라도, 언젠가 화창한 날의 나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담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명상적인 곡이라 소개하고 노래를 불렀다.


선생님은 내게 "speechless"라는 극찬을 해주었다. 조오금 부끄럽고 울컥했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인가? 만약 이 행복이 다시 오지 않는다면, 나는 이 순간을 충실히 행복해야 하나?'

행복과 슬픔이 공존하는 감정을 느꼈다.

명상을 하며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됐다.

좁아터져서 나조차도 들어갈 수 없던 내 공간이, 점점 넓어져갔다.


노출치료

이후로 선생님은 개인톡으로 시도 때도 없이 "소흐님 노래가 듣고 싶다"며 영상을 찍어 달라고 했다.

수백 명(수십 명?)이 참여한 세바시 강연 줌미팅에서도 내게 썸데이를 불러달라 요청했다.

말했듯이, 나는 한국어를 한다기보다, 소흐어를 하는 사람이었다.

종종 있는 20명 남짓한 영어강의 줌 미팅에서 내 개인적 생각을 밝히는 일은, 롯데타워 꼭대기에서 안전장치 없이 서 있는 것과 같은 공포였다.

선생님은 그런 나의 상태를 눈치챘던 것 같다.

명상강의가 끝날 때마다, 매번 나에게만 소감을 물어왔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노래를 시켰다.

그렇게 나는 군중공포를 조금씩 극복하게 됐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공부방은 점점 커졌다.

1300명까지 차오르자, 결국 기존 방을 닫고 새해에는 새로운 방을 만들었다.

활동 인원들은 자연스럽게 새 방으로 이동했다.

선생님은 이사기념이라며 내가 개인톡으로 보내 주었던 '썸데이' 영상을, 새 방에 공유했다.

YouTube:소흐 - Someday

아무리 녹화를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그게 내 실력이지만, 우연히라도 더 잘 부른 영상을 보내주고 싶었다.

결국 선생님에게 "도저히 노래가 나오지 않는다, 미안하다"며 거절하려고 했더니, 선생님은 가볍게 ㅎㅎ 웃으며 말했다.

"저도 노래 부르는 게 힘들었는데, 누군가가 힘을 빼라고 해서 뺐더니 점점 노래 부르는 게 편안해졌다"

선을 넘지 않지만 분명한 조언을 보태주었다.

그리고 다시 녹화를 했다.

여전히 맘에 들지 않았다. 인정해야 했다.

부끄럽지만 있는 그대로 보내주었다.


공부방을 떠난 후 나타난, 새로운 문.

이후, 공부방이 문화와 수다를 즐기는 분위기로 흐르자, 영어만 공부하기 위해 찾아왔던 사람들은 불편함을 호소하거나 조용히 방을 나갔다.

결국 '수다방'이라는 별도의 방이 만들어졌다.

물론 그때 이후로도, 영어 공부는 꾸준히 이어졌다.

선생님은 서로의 학습을 공유하며 동기부여를 할 수 있도록 소규모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주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흩어져 공부를 이어갔다.

나 역시 큰 방에서도, 작은 방에서도 여전히 열정적인 모범생이었다.


이후, 톡방 물갈이가 한 번 더 이루어졌다. 나는 그곳에서 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공부를 인증했다.

기초 공부가 필요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래서 이후에 들어올 새내기들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기로 했다.

그동안 얻어 간 것들에 대한 감사 인사를 남긴 뒤, 방을 나왔다.

남아있던 두 번째 방에서, 그리고 내가 직접 만든 새로운 공부방에서 2년 2개월째 매일, 공부한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


나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준 소중한 인연들... 그 사람들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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