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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고초.....라한 나를 건반으로 영입한 밴드

내가 제갈량이었으면 좋겠다...

by 소흐

나는 연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무대에 서게 됐을까.


직장인밴드

무기력했던 전 애인에게 그나마 활기를 찾아준 건, 이웃 동네의 한 밴드 연습실이었다.

밴드연합이 돈을 모아 공간을 대여하고 공연도 하는, 도 전역에서 밴드들이 모여든 꽤 오래된 모임이었다.

나는 스물 중후반이었지만, 그곳에서는 가장 어린 축에 속했다.


그 시절 나는 사춘기의 관성이 아직 남아 있었다. 시니컬했고, 정확히 말하면 싸가지가 없었다.

창작이 아닌 카피곡을 연주하는 이들을 겉으로는 예의 있게 대하면서도 속으로는 깔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철없고 멍청했다. 악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나는 그들의 실력을 알아볼 눈도 없었다.

본업을 유지하면서 음악을 병행하는 지금에서야,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음악기술자였는지를 깨닫는다.


전 애인의 오디션을 따라 처음 간 연습실에서는, 우리가 도착한 줄도 모른 채 기타 소리가 가득했다. 늦게야 우리를 알아본 형들은, 그의 연주를 듣지도 않고 잘생기고 매력적이라서 합격시켰다고 한다...-_-


밴드의 정체성

그 팀은 '스피드 멜로딕 메탈'을 지향하는 밴드였다.

이 팀을 통해 스트라토바리우스나 헬로윈 같은 유럽 밴드들의 음악을 처음 제대로 듣게 됐다.

스트라토바리우스가 사실 헬로윈과 더불어 멜로딕 메탈의 선두주자였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어릴 적, 드라마 '첫사랑'에 나오는 'Forever'를 듣고, 그들을 조신하고 아름다운 발라드 밴드라고 여겼던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밴드 형들이 멜로딕 메탈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 줄 때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격정적인 사운드에 빠져, 13분짜리 곡도 수십 번 반복해서 들었다.

마치 매초 단위로 급등과 폭락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코인 투자자처럼,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심장이 쿵 내려앉고 다시 고조되는 기분이었다.


밴드 안에서의 내 정체성

그곳에서 전 애인의 뒷바라지를 자처하며 팀의 로고를 만들거나 포스터 디자인을 해주었다.

덕분에 '연습실 가입비'가 면제됐다.

봉사는 내가 했는데, 혜택은 전 애인이 가져갔다. 칫.. 그땐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전 애인의 밴드 활동으로 대리만족을 느꼈다. 그가 무대에 서는 걸 보면서, 나는 도전하지 않은 것에 대해 자신에게 면죄부를 받았다.

그렇게 무대 밖에 머물렀다. 사실 그도 이 팀에 오래 남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며 팀을 탈퇴했다. 나는 덩그러니 끈이 끊겨버린 채로, 팬인지, 무수리인지 모를 모호한 존재로 남게 되었다.

남은 건 리더 형의 전화번호 한 줄과, 어딘가 미완의 감정뿐이었다.


몇 년 후, 리더 형에게 연락이 왔다. 그는 '쓸모 있는 사람과는 쉽게 연을 끊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쌓아온 본인의 이미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다정한 척 시니컬하고 절박하지 않지만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장사꾼 같은 대사에 애정이 묻어났다.

사실 조금 어이없었지만, 기분 좋은 웃음이 났다.

솔직하고 무례했지만, 매력적이었다. (역시 잘 생기고 봐야...) 그렇게 다시 형들이 있는 채팅방에 복귀했다.




삼고초...라한 금은보화

어딜 가나, 금은보화 같은 파트가 있다.

우리 밴드에서는 늘 건반과 베이스 자리가 문제였다.

베이스는 그럭저럭 잘 구해졌지만, 건반은 달랐다.

정확히 말하면, 피아니스트는 있어도 키보디스트는 드물었다.

피아노만 쳐오던 사람들은, 대부분 '신스' 사운드에 익숙하지 않았다.

건반 연주자 중 한 명은 호기심도 많고 연구도 열심히 했다.
밴드에 어울리는 소리를 만들어내려 꽤 열중했지만, 결국 얼마 못 가 탈퇴했다.


피아노에 얽힌 내 유년기 기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시절, 할머니는 눈만 마주치면 늘 말했다.

"피아노 사줄게."

그건 우리 엄마에게 허세부리는 말뿐이었다는 걸, 나는 훨씬 나중에야 알았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디지털 건반 하나쯤은 적당한 가격에 누구나 살 수 있다.

나도 하나 장만하고선 밴드 채팅방에 연주 영상을 올리며 자랑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간 이 밴드의 건반 자리.

리더형은 함께 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거절했다.

멜로딕 메탈의 곡들은 bpm 150이 느린 축에 속한다.

그 속도면, 내가 손에 익히는 데만 몇 달이 걸릴 게 뻔했다.

나는 70~80 bpm짜리 코드 반주 하나만 연습해도 한참이 걸리는 사람이다.

폐 끼치고 싶지 않았다.

좀처럼 들을 수 없는 명곡들을 눈앞에서 라이브로 즐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그 무렵 여전히 동굴 속에 숨어 있었지만, 이 밴드는 내 외부 활동의 유일한 끈이었다.
유일한 외출은 기타 형님을 보러 가는 일뿐이었고, 그 형의 다정한 말투는 내게 아주 귀한 위로였다.

그래서 완전히 떠날 수도 없었다.
나는 디자인을 해주는 방식으로, 밴드와의 연결을 간신히 유지해 나갔다.


이후에도 내부에서 건반 걱정이 생길 때면, 리더 형은 나를 소환했다.

"네가 건반 해라." 마치 밥 먹었냐는 인사처럼 큰 의미 없이 말을 던졌다.

북적한 채팅방이 또 뭐가 거슬렸는지 나와버렸다.

뭐라고 하고 나갔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밴드 대운의 변화

리더 형이 보컬 형의 탈퇴 소식을 전했다.

우리 전 보컬 형님은 애 셋 아빠이자 학교 선생님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 고음을 가장 시원하게 뚫는 사람이었다.

무명가수 대회가 열린다면, 분명 상위권에 속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항상 바빴다. 가사를 외울 여유조차 없어, 밴드 멤버들에게 잔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그동안 버틴 것도 오랜 정 때문이었을 거다.


예상대로, 리더 형은 내게 다시 합류를 권했다.

나는 또 거절했다. 하지만 이번엔 물러서지 않았다.

성남시에서 '신해철 거리 행사'에서 섭외가 들어왔다며, 일단 해보자고 했다.

그는 자신이 보컬을 맡을 것이고 멜로딕 메탈 보컬은 자신도 감당할 수 없으니 걱정 말라고 말했다.

"네가 없으면 밴드는 해체야."라는 말도 덧붙였다.

협박인지, 설득인지 모를 말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마음 한켠이 움직였다.

결국,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그래. 망하면 형 탓이다."

끈질긴 구애를 받은 끝에, 밴드에 영입되었다.




오른 건반

밴드 소유인 100만 원짜리 장난감 같은 신시사이저를 넘겨받았다.

'신해철' 하면, 내가 좋아하는 서태지의 친척, 한때 푹 빠졌던 '사탄의 신부'를 쓴 사람.

셋 리스트를 보니 아는 곡이 없었다. 왜 나는 이제야 이 노래들을 알게 된 걸까? 음악을 폭넓게 들어왔다고 자부했는데, 해외 밴드에 빠져 있느라 정작 국내의 훌륭한 음악인들에게 소홀했던 게 아쉬웠다.

좋은 건 항상 나누고 싶다.

오랜 친구들에게 연락할 구실로 신해철의 노래를 공유하기도 했다.


곡을 감상할 때는 그냥 피아노와 전자음 두 가지로만 구분했었다.

그런데 연습을 하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이건... 손이 네 개여야 가능한 곡 아닌가?


첫 합주

첫 합주에서 왼손으로 피아노, 오른손으로 스트링을 편곡해 갔다.

허허 웃으며 팩폭을 날리기도 하고 후한 평가를 해주기도 하는, 마치 교감 선생님 같은 드럼 형이 내 연주를 듣더니(지금은 진짜 교감선생님이 되었다.) "소흐가 귀가 좋네."라고 말해주었다.

낯선 칭찬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계획대로 되진 않았다.

아쉽게도 아직 손이 두 개뿐.

어찌어찌 두 달을 채우면 곧 공연날이었다.

나는 건반 연주자가 한 명 더 필요하다고 했고, 형들은 주변을 샅샅이 뒤져 연주자를 구해왔다.


새로 온 연주자는,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신스에 대해 전혀 몰랐다. 피아노만 쳐왔던 사람이었다.

자연스럽게 내가 신스를 맡게됐다.

가르쳐 줄 사람도 없어, 맨땅에 헤딩하듯 배워나갔다.

오실레이터가 뭔지, 그건 왜 두 개, 세 개나 되는지, LFO, ADSR… 무슨 암호 같은 용어들이 쏟아졌다.

형들도 신스에 대해선 잘 모른다며 "대충 해."라는 말만 남겼다.

살의가 솟았다. 리더 형은 대충 하면서도, 결과물은 그럴싸했다.

말만 들어보면 나와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었다.

그는 '대충 해도' 소리를 잘 빼는 사람이었고, 나는 '완벽하게 하고 싶어서' 미친 듯이 연구하는데, 내실이 없어서 결국 대충이 되어버린다.

이게 실력과 연륜인가 보다. 본인도 초짜일 땐 나처럼 했을 거 아니냐고 물어본 적 있는데, 자신은 그때도 대충 했다고 한다.

좀 재수 없었다. 아무튼 다 잡은 물고기는 이런 신세구나 싶었다.


풍성하지 않은 신스 사운드에 비해 건반 인원은 둘이나 되니, 하나는 오른손 건반, 하나는 왼손 건반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듣는 이들에게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서 연주하니까, 좋게 봐주세요'라는 의미의 밑밥이었다.

그렇게 첫 번째 공연을 마쳤다.


신해철

밴드는 메탈을 잠시 접어두고(어쩌면 영영) 신해철 트리뷰트 밴드로 안전하게 환승했다.

문제는, 신해철의 음악에는 레퍼런스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의 노래들은 어떤 하나의 틀로 정의되지 않았다.

록, 일렉트로닉, 클래식... 장르 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하나의 틀에 갇히지 않는 음악. 재현하기엔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형들은 이 곡들을 놀이처럼 연주해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20년 전부터 신해철의 노래를 즐기며 몸에 익혔고, 나는 이제 막 신디사이저를 다루기 시작한 사람이었다.

이 간극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두 번의 공연을 마친 후, 함께하던 왼손 건반 연주자가 조용히 팀을 떠났다.

나는 자연스럽게 '양손 건반'이 되었다.

성장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아니,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이었다.


껍질의 파괴

형들의 숙원이었던 '껍질의 파괴'라는 곡이 있다.

쪼개서 두들겨대는 메탈만 하던 사람들이, 말랑말랑한 곡을 연주하려니 근질거렸을 거다.

YouTube:넥스트-껍질의 파괴

이 곡을 꼭 연주해야겠다면 내게 1년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실제로 1년까지는 걸리지 않았다.

연말이 되기 전, 약속대로 곡을 완성했다.

'나는 무능하다'는 오랜 자책과 회피의 껍질이 그 순간 함께 부서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당시 내가 쓰던 신디사이저는 단순한 76건반.

그 안에서 어떻게든 소리를 짜내야 했다.

스플릿, 레이어, 프리셋.

하나의 곡에 필요한 소리를 땜질하듯 덧붙이고, 뒤섞고, 메꾸면서 어떻게든 소리를 만들었다.

사운드를 다루는 공식도, 이론도 모르던 나는, 어떻게든 만들어내야만 하는 소리라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안 들었다.

무식한 방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무대를 해냈다는 사실이 무식함을 용서해주었다.


The Ocean : 불멸에 관하여

그렇게 무대를 여러 번 밟다 보니, 자연스레 더 애정이 생기는 곡도 생겼다.

'The Ocean'이라는 곡이 그랬다.

'갤럭시 익스프레스'의 '언제까지나'라는 노래는 내 애플뮤직 누적 재생 횟수 1위인 곡이었다.

1000번 이상 들은 걸로 확인됐다.

'The Ocean'은 단 6개월 만에 그 기록을 바짝 따라잡아, 2위에 안착해 있다.

카피하면서 지겹게 들었지만, 아직도 이 곡은 나를 설레게 한다.

이 곡이 나의 시그니처 사운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원하면서도 묵직하고, 우주처럼 넓고, 파도처럼 반복되며 밀려오는 구조.

그 안에 꽉 차 있는 텍스처를, 작은 장난감 같은 신시사이저 하나로 구현해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조금은 기특하다.

YouTube:넥스트-The Ocean

나는 뭐든 빨리 배운다.
정확히 말하면, 빨리 흉내 내는 데 능숙하다.

공연이 끝나고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그 음색, 어떻게 만들었어요?"였다.

같은 문장이었지만, 전하는 사람이 다르니 그 안에 담긴 의도도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저도 몰라요." 진심이었다.

어떻게 했는지 정말 몰랐다. 그냥 귀로 비슷한 소리를 따라가기만 했을 뿐이었다.




내리막 길

어느 날, 일이 터졌다.
이번 공연은 신스 사운드가 핵심이 되는 무대였다.
새롭게 장만한 장비와 함께 세팅한 노트북이 필수였다.
며칠을 밤새우며 프리셋을 짰고, 드디어 모든 준비를 마치고 공연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노트북이 없었다.

집 안 현관 옆에 조심스레 세워둔 그걸, 그냥 두고 온 것이다.

공연 2시간 전, 식은땀이 솟았다.

차를 다시 타고 돌아갈 시간은 없었다.

급히 퀵배송 업체를 수소문했고, 노트북은 리허설을 포기한 채 공연 직전에야 도착했다.

리허설 없이 올라간 무대.
손은 멈추지 않았지만, 귀에는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신경 쓴 프리셋은, 관객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만 재생됐다.
공연이 끝난 뒤, 한동안 멍해 있었다.

그날의 무대는 내게 물었다.
"정말 계속할 거야?"


실수는 계속해서 나를 자책하게 했다.

그리고 새로운 곡들이 계속 추가될수록, 지쳐갔다.

그 무렵, 사무실 일도 자주 밤을 새야 할 만큼 바빴다.

능력 밖의 곡들을, 준비도 제대로 못한 채 몇 달에 한 번씩 만나 대충 맞추고 끝내버리는 과정이 불편해졌다.

합주일이 다가올 때마다, 숨이 막혔다.

합주가 더 자주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형들이 너무 대충 연습하는 게 답답했지만, 제일 문제가 많던 내가 뭐라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결정타

어느 펍에서 공연을 하게 됐다.

이미 쉴 틈 없이 달려오면서 번아웃이 온 상태였다.

연습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음가짐부터 이미 망한 무대였다.

나는 무대체질이었다. 17살, 댄스팀 리더로 춤을 추던 때가 있었다.

동대문 두타 같은 작은 무대에서 작지만 페이를 받으며 공연을 하기도 했다.

환호를 받을수록 무대에서 더 힘을 내는 조용한 관종타입이다.

그날은 달랐다. 건반을 치고 있기는 한데, 내가 뭘 연주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들렸지만 소음이었다.

리더 형이 나를 흘끗 쳐다봤다.

그저 움직이는 손과 건반을 내려다봤다. '망했다.' 그 한마디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공연이 끝난 뒤, 리더 형이 물었다. "대체 뭘 연주한 거야?" 나는 말했다. "모른다. 나도."




나는 무엇을 원했던 걸까? 나는 연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리스너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무대에 설 때보다 좋은 음악을 들을 때 온몸으로 들으며 전율을 느낀다.

그런데 왜 무대에 서게 됐을까? 몇 번의 공연으로 주변에서 들려오는 칭찬이 내 주제에 과했던 걸까.

나는 생각이 많다. 어떤 날엔 장점이 되지만, 지금은 확실한 단점이었다.

더 노력할 힘이 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등 떠밀리듯 건반을 치는 건 이제 끝내고 싶었다.

매번 수습하듯 무대를 서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소리에 몸을 맡길 때처럼, 손끝에서도 같은 전율을 느끼고 싶다.


리더형에게 말했다. "1년만 시간을 주세요. 기초부터 다시 다지고 오겠습니다." 신스의 기본적인 사운드 구조를 익히고, 손가락의 움직임도 단련해야 했다.

정말 잘 연주하고 싶었다. 신해철 트리뷰트 연합방에도 이 사실을 알리고, 방을 나왔다.


형들에게 말한 업글패치를 받고 돌아오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리더 형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세계를 좀 더 확장하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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