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나는 미국 명문대 캘리포니아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ego), 국제관계학(International Relation and Pacific Studies) 과에 남미지역 정치외교학 전공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첫 수업을 가는 길이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시장 바닥에서 만두 팔이 소년이 미국까지 유학 온 것만 해도 큰 이슈인데 명문대에 입학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아 콧노래를 부르며 등교했다. 첫 수업은 정치학 개론(Policy Making Process)이었는데, 정치 외교학의 기본이 되는 과목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정치구조를 습득하고 비교하는 수업이었다. 주로 미국이나 한국 같은 대통령제와 영국이나 일본 같은 내각 제도를 비교하면서 정치의 기본을 공부하는 과목이었다. 이 과목을 이수하지 못하면 다음 과목을 들을 수가 없고 졸업이 되지 않기 때문에 전교생 모두가 본 과목에 총력을 기울인다. 나 역시 정치 외교는 처음 접하는 과목이라 이 과목만은 꼭 A만점에 C이상을 맞아 패스해야 지 하는 각오를 가지고 이를 악 물고 공부했다.
다른 과목들은 크게 신경을 안 썼다. 수업 듣고 수업시간을 녹음해서 반복해서 여러 번 다시 듣고 남들이 노트한 것을 다시 정리하여 수차례 복습하고 중간고사 시험 전에는 밤잠을 설쳐가며 공부했다. 한국에서 학력고사도 보고 브라질에 이민 왔지만, 태어나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 적은 처음이었다. 우리 학교 도서관은 참 잘 꾸며져 있는데 나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공부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아침에 밥솥에 밥을 한가득해가지고 고추장과 치즈를 넣어 같은 주먹밥 메뉴로 아침 점심 저녁을 해결해 가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드디어 중간고사시간이 돌아왔다. 나는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동원해서 시험을 치렀다. 얼마 후 결과가 나왔는데, 아뿔싸! 이게 웬일인가 전교 학생 100명 중 1명에게만 준다는 F를 내가 받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의 모든 것을 투자하여 가까스로 입학해서 그토록 열심히 이 과목만 공부했는데 F라니! 나의 꿈은 이대로 무너지고 다시 브라질로 돌아가야 하나 하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내 한계를 넘어선 결과인 것 같았다. 그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우리 대학 정치 외교 과는 세계의 수재들이 다 모여서 공부하는 곳인데 공부도 못하고 새로운 정치 과목 수업에서 내가 꼴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아는 문제들을 주관식으로 빽빽하게 답했는데 맞춘 것이 별로 없었나 보다. 큰일이다 싶어서 조언을 구하려고 작년에 꼴찌 한 친구가 누구인지 알아내 보니 미국인 David라는 친구이다. 이 친구는 학부도 같은 캘리포니아 대학 캠퍼스인 산타 바바라 대학교(University of California, Santa Barbara)를 졸업하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유명한 재미있는 친구이다. 이 친구는 나보다 1년 전에 입학했으나 본 과목에서 낙제하여 재수를 하고 있었다. 우리 과에 나를 많이 이끌어 준 한국 통일부에서 파견을 나온 형님이 있었는데 그는 당시 David를 이렇게 묘사했다.
“David는 참 재미있는 친구이더군. 나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학과로 들어올 때 그 친구와 자주 마주치는데 항상 볼 때마다 콧노래를 부르며 다니더라고. 꼴찌 하고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참!”
나도 궁금해서 David를 찾아가서 방법을 찾을까 해서 의논하였더니 David도 중간고사 때 F를 받았지만 기말고사와 숙제를 열심히 하여 C-를 최종 점수로 맞아 학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 과는 입학생의 30%가량이 학교공부를 끝까지 못 따라가고 중도에 포기한다고 한다. 명문대학교의 전통과 학과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란다. 나도 David처럼 그냥 끝까지 해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자신도 없었고 나는 정치학 박사를 미국에서 진학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어서 기본과목에서 점수가 나쁘면 내가 입학하고자 하는 대학에서 나를 받아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할 수 없이 이 과목을 보류하고 다음 학기에 다시 듣기로 했다.
원래는 기본 과목이라 보류하면 다음 과목들을 들을 수가 없는데, 학교 컴퓨터 시스템 상에 오류가 있었는지 하늘이 도와 무사히 통과해서 다음 학기에 B를 맞았다. 그런데 산 넘어 산이었다. 얼마 후 파인버그(Feinberg)라고 하는 미국 안기부 출신의 유명한 교수의 APEC의 아시아 정치경제과목을 들었는데 또 F를 받았다. 솔직하고 직선적인 미국 교수들은 나의 리포트를 보고 솔직하게 F를 준 것이다. F를 2개나 받은 학생은 내가 처음인 것 같았다. 정말이지 가면 갈수록 태산이었다. 미국의 교육 시스템은 입학하기는 쉬워도 졸업하기는 어렵다는데 봐주는 것이 없이 냉정하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