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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ustavo kim 김성한 Oct 27. 2024

공산국가에서 맹인 선수 코치를 하며

나는 장애인에게 스포츠 교육을 하는 것이 의미 있고 값진일이라고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이 하나님이 내 인생의 후반전을 위해 준비해 놓은 곳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공산국가인 이곳을 방문하기 위해 경유지 국가에 도착하니 대사관 직원이 공항까지 나와 우리를 환영해 주고 호텔까지 바래다주며 비자를 건네주었다. 


다음날 아침 공항에서 유명한 탁구 선수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하려는 철인 3종에 관한 계획을 이야기하니 마침 준비되어 있는 장애자 맹인 선수가 있으니 이번 기회에 꼭 만나 보라고 귀띔해 주었다. 이 선수는 어렸을 때 수영선수였는데, 다이빙을 하다가 머리가 땅에 부딪혀 시력을 잃었다고 한다. 지금 나이는 40세로 운동을 워낙 좋아해서 달리기를 열심히 하여 리오 장애인 올림픽에 출전했으나 경기 중에 같이 뛰어 주는 가이드 선수 다리에 쥐가 나서 중도에 포기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고 했다. 이 선수는 올림픽 선발전에서는 1위로 선발이 되어 리오에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꿈이 있었다고 한다.  몇 년 전 한 일본인이 이 선수를 일본 마라톤에 나갈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켜 놓았는데, 정치적 이유로 입국을 할 수 없게 되어 모든 것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무사히 체크인을 하고 비행기를 탔다. 승무원들이 예쁘고 친절했을 뿐 아니라 안내방송을 하는 영어발음은 최고인 것 같았다. 우리가 탄 비행기 안에는 현지인을 비롯해 이웃나라 무역상들이 대부분이었다. 수도 공항에 도착하여 이민국을 통과하는데 이민국 직원들이 모두 군복에 챙이 높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 부스 안에 아리따운 아가씨가 “처음 온 소감이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세계를 많이 돌아다녀 보았지만, 보통 이민국에서는 “왜 왔으며, 언제까지 있을 것인지, 호텔이 어디인지” 등의 질문만 하는데 이렇게 정감 있는 질문을 받으니 기분이 참 좋았다. 마음속으로는 “이민국 아가씨가 참 예쁘고 인간다워서 기분이 최고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냥 “참 친절하고 좋습니다”라고 점잖게 답변해 주었다. 


출구를 통과하니까 검정 양복을 입은 안내 동무와 운전사 동무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안내 동무는 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안내를 도와주었다. 큰 길마다 군복을 입은 여경들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 모습은 참 신기했다. 

우리 차는 공항을 벗어나 시내로 향했다. 평민들이 농사짓는 모습, 소 달구지에 짐을 실어 운반하고 자전거를 타고 광야를 달리는 풍경들은 참 서정적이며. 평화스러워 보였다. 나는 신문사 건물이 있는 호텔 앞에 여정을 풀었다. 호텔 시설이 좋았고 식당과 침실들이 널찍했다.


아침식사 시간에는 외국에서 온 한 부부를 만났다. 사업에 성공했으나  이곳에서의 신규사업을 위해 수차례 방문했다고 한다. 이곳 사업체를 열 번 이상 경영해 보았으나 지금까지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지금은 국경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어서 보내는 사업을 한다고 한다. 두 노부부는 일흔이 넘었다고 했는데, 수많은 역경을 겪어서 그런지 인상이 참 해맑고 멋져 보였다. 사업해서 돈도 많이 벌었을 텐데 어떻게 지금 농사를 짓고 시골에서 살고 있을까 해서 여러 방면으로 그의 삶에 대해 질문해 보았다.


“나는 30년 간 사업을 하며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 인생에 아무리 많은 돈을 은행에 저금해 놓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은행계좌에 있는 돈은 내 돈이 아닙니다.  내 돈은 써야지 비로소 내 돈이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무엇을 하며 지금 무엇을 먹고 어디서 자는가 하는 것인데. 나의 인생 후반기는 이곳에서 사업을 하며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살고 싶습니다. 내 나이 일흔인데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만약 이곳에서 하고 싶은 사업이 있다면 가이드가 정부와 연락하여 관심 있는 사업 부분의 전문가를 소개해 준다. 만약 내가 공장을 설립하고 싶다고 하면 경험이 있는 분야 공공기업의 공장장을 소개해주고, 그 사람과 정보교환 하며 사업계획을 구상하여 정부와 합작회사 계약(ex: 50:50)을 하면 된다. 모든 회사들은 정부 소유이므로 정부와 계약을 하게 된다.


이곳에서 만난 한 외국인은 장애인들이 일할 수 있는 공장을 세워 제품을 세계에 수출하는 꿈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이곳을 열 번 이상 왕래 하면서 3년에 걸쳐 사업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쉽지 않네요. 얼마 전,  처음으로 샘플을 받게 되었는데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아요. 수익사업보다 장애인들이 제작한 제품을 다른 나라에 소개해 주고 싶은데, 어려움이 많아 어떻게 판매처를 개척할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나는 장애자 연맹을 방문하여 나의 관심사를 의논하였다. 나의 사업을 도와주는 사장은 장애자 일을 돕는 데 많은 열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장애인 육상 선수를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 선수는 에너지가 넘치고 유머감각이 있는 재미있는 맹인 선수였다. 내가 본 맹인 육상 선수는 5명 정도 되었는데, 그중 경험이 많은 선배로서 리오장애인 올림픽을 비롯해 여러 대회에서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내와 자식이 자기를 적극 후원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운동장으로 이동하여 처음으로 동행하여 달리기를 했다. 내 팔에 끈을 묶어 선수를 가이드하면서 운동장 큰 바퀴를 돌았다. 내 생애 처음으로 맹인 선수와 동행하는 순간 가슴이 벅찼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랜만에 이런 감정을 느꼈다. 결코 내가 이곳 장애인들에게 한 약속을 저버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장애인 선수를 훈련시켜 꼭 세계대회에 출전시키기로 결심했다. 그 계획이 그리 쉽지만은 않겠지만, 내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 


훈련계획을 협의하고 있을 때 같은 방에는 다른 젊은 맹인 선수들이 앉아 있었다. 나는 한 선수에게만 계획이 있었는데 다른 선수들도 에너지가 넘쳐흘러 보였다. 그래서 계획을 좀 바꾸었다. 한 선수를 주력으로 훈련시키되 다른 맹인 육상선수들도 같이 교육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을 작성하였다. 나는 체육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고 코치 자격증이 있는데, 그동안 제대로 써 본 적이 없었다. 체육학 박사학위로 대학강단에 서서 교수님 소리 들으면서 돈을 벌었고, 코치자격증으로 잘 나가는 정치인, 경제인, 연예인을 가르치면서 잡지에나 실리고 자랑스러워했는데, 이제 나의 재능을 쓰며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단기 여행이었지만 이곳의 풍경, 자연, 인간미, 음식등 많은 감동을 받았다. 사람 관계가 수평적이고 격의 없이 친밀한 것 같았다. 우리 사회에서는 사장, 과장, 대리 또한 모르는 사람은 아저씨, 아줌마, 아무개 씨라는 명칭을 쓰는데,  호칭이 동무와 동지 두 가지밖에 없다. 운동선수도장애협회 사장에게도 사장 동지라고 하고 식당 웨이터는 봉사 동무라고 하는 것은 참 정겨운 느낌이었다. 남미 식인 아미고(Amigo)도 이곳 호칭과 비슷하다. 격식과 존칭을 쓰다 보면 거리감이 느껴지는데,  동무라고 부르니 서로 친구라는 의미로 금세 친해져서 호칭이 참 마음에 들었다. 외국에서 오래 생활한 나도 한국에 오면 아무개 씨나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참 부 자연스럽고 거북했다. 지나친 격식을 갖춘 호칭을 바꾸면 더 효율적이고 좀 더 편안한 관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낙천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얼굴 표정에서 나오는 해맑은 모습을 보니 자연환경이 파괴되지 않는 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참 친절하고 웃음이 맑고 순수했다. 관광 가이드를 해준 가이드는 스물여섯 살 처녀였는데,  관광 내내 우리와 함께했다. 그녀는 명승지 설명도 참 재미있게 했다. 한마디 한마디에 농질(농담)을 얼마나 잘하는지 야한 농질도 서슴지 않았다. 마치 브라질 사람처럼 낙관적인 면에서 닮은 점이 많았다.  


또 한 가지는 호텔이나 대부분의 관광단지들이 고유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성형을 하지 않았는데 미인들이 많았고,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시내 지하철역도 매우 인상 싶었다. 역사 건물에, 기차에는 각 칸마다 여차장이 제복을 입고 서 있었다. 주민의 옷차림 역시 멋졌다. 이수일과 심순애 영화에 나오는 하얀 한복 저고리에 검은색 치마를 입은 여학생들이 얼마나 예쁘던지! 코너마다 제복을 입고 호루라기를 부는 여순경들도 눈에 띄었다. 수염을 기르거나 반바지 입은 남자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긴 머리에 염색을 한 남자도 없었다. 내가 반바지를 입고 긴 머리에 염색한 꽁지머리를 하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흘깃 쳐다보았다.


‘왜 진작 여기에 와 볼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창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소달구지에 매달려 지나가는 농부의 모습, 해변가를 뛰어다니는 얼굴이 새까만 아이들, 농부들의 자전거 타는 모습 등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요트 타는 취미가 있고 바다를 좋아해서 바닷가를 유심히 관찰했다. 해안가에 인적이 없고 굽이굽이 이어지는 해안도로에는 자전거가 주로 다니고 있었다. 그 절경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세상 구경을 그렇게 많이 다녀봤지만, 이렇게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은 어디에 가도 볼 수가 없었다.  


맛있는 전통음식들은 요리에 관심이 많은 나를 사로잡았다. 브라질에 오래 살아서 고기나 이태리 음식을 즐겨 먹었지만, 이곳은 참 맛있고 신기한 음식들이 많았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명태 말린 안주와 냉면이었다. 옥돌관은 냉면으로 유명한 식당이었다. 줄을 서서 들어갈 정도로 맛집 중의 맛집이었다. 앉자마자 반 건조 명태 한 마리가 내 식탁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에선 명태가 더 이상 잡히지 않는다고 하던데 여긴 아직 명태가 많이 잡히나 보다. 그런데 그 명태가 신선하고 쫄깃한 게 얼마나 맛있던지 나는 추가로 몇 마리 더 주문해서 배낭에 넣어 출국하는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먹었다. 


냉면의 담백한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우리가 항상 먹어왔던 냉면 과는 좀 다르다. 매운 다진 양념도 없고 그냥 순수한 면의 맛이다. 아주 담백하면서 입에 착착 붙는다. 조미료도 넣지 않고 구수한 고기 국물에 손으로 빚은 국수 맛은 일품이어서 거의 매일 냉면을 먹으러 갔다. 고기는 수입산이나 양념이 많이 들어가 내 입맛에 맞지 않았으나 해산물은 싱싱하고 전에 보지 못한 신기한 생선들이 많았다. 작은 고기를 회로 먹었는데 신선하고 정말 맛있었다. 멍게도  색깔도 진하고 크기도 더 컸다. 광어와 우럭도 있었으나 여기서 그리 흔한 생선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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