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토리망자 Sep 24. 2024

먼지보다 가벼운 기록 06


06.


‘미안해요, 선배. 그치만 나 아직 선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정우는 얼마간 울다 웃다를 반복하며 에스테의 품에 안겨 나지막이 말했다. 오 년 전, 정우가 이름 없는 행성의 궤도에서 탈수와 불안 증세를 안고 구출된 이후에 에스테는 그의 곁을 오래도록 떠나지 않았다. 병원비와 생활비가 속절없이 에스테의 빈약한 잔고를 휩쓸고 지나가도 에스테는 정우를 따라 두 번의 출장을 고사했다. 돈은 다시 벌면 돼.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쓰라고 돈을 버는 거야. 에스테는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정우를 향해 부러 자신만만하게 말하곤 했으나 불안은 손끝과 발끝에서 먼저 느껴지곤 했다. 잠든 정우로부터 등을 돌려, 잔고를 확인하고 대출을 알아보는 밤이 길어지고 있었다.


다시금 에스테가 출장을 나갈 수 있었던 건 정우가 털어놓은 속내 때문이었다. 마침 에스테 역시 더 이상 수입이 없는 상태를 견디지 못해서 정우에게 이야기를 건네려던 참이었다.


‘제 우주선에 불이 붙어서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점점 떨어지고 있을 때, 솔직히 저는 제가 한심했어요. 큰 소리 뻥뻥 치던 제가 당연히 마주하게 될 결말이 이런 건가 싶기도 했고요.’


에스테는 손사래를 치며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입술이 달싹거릴 때, 정우는 단호한 눈빛으로 자신이 계속 말을 이어가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아니면 이런 생각도 했어요. 여객선 사고에서 홀로 살아남은 아이가 받지 못한 벌을 여기서 받는 건가. 누군가 구해준 값진 목숨을 더 의미 있게 사용하지 못하고, 나를 홀로 남겨둔 부모를 원망하고, 나를 구해준 누군가의 호의조차 원망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게 아닌가 하고요.’


정우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그동안의 불안과 공황에 의해서 터져 나오다시피 시작된 이전의 울음과는 달랐다. 에스테가 보기에 정우의 눈물은 그간 정우 자신을 옥죄었던 죄책감과 외로움이 만들어낸 썩은 감정들을 내보내는 과정에서 나타난 잔여물로 보였다.


‘불안은 어떤 행성의 중력에 이끌려 하루하루를 빙빙 돌기만 하던 그 몇 주 동안 자라났어요. 이전까지는 분노와 슬픔밖에 없었는데 그때부터는 기억이 저를 지배했어요. 보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선명해지던 어린 날의 기억이요. 죽은 엄마와 아빠. 도와달라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던 그날이 생생했어요. 비좁은 데브리 회수 우주선 안에서 보낸 그 몇 주간은 불안함에 몸을 떨고 있던 어린 날의 저와 단둘뿐이었죠.


나를 구해준 그 사람이 희미하게 생각났어요. 우주복을 입고 있어서 이목구비가 뚜렷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를 작은 구조 우주선에 태워주며 했던 말이 떠오르더라고요. 조금만 참으라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고,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사람을 분명 찾을 거라고요.


마치 미래를 보고 온 사람처럼 단호하고 명확하게 얘기했어요. 몇 살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 말투와 목소리는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할 수 있어요.’


에스테는 그 누군가에게 갚지 못할 빚을 진 것만 같았고 동시에 약간의 질투가 났다. 정우로 인해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기에. 정우는 배시시 웃으며 에스테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근데 우주선에 갇혀서 그 사람이 해준 말을 되뇔 때마다, 선배가 생각나는 거예요. 그 사람의 목소리가 마치 선배의 목소리 같았고 그 사람의 단호한 말투가 저를 진정시키는 선배의 말투 같은 거 있죠. 진짜… 평생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사실 그렇게 생각하고 난 뒤부터 오로지 선배 생각만 했어요. 정신을 잃기 전까지도 아마 조금 있으면 선배가 나를 깨워주리라는 생각에 빠져 있던 것 같았고요.


그리고 전 제 직감을 믿었죠. 눈을 떴을 때,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에스테 선배를 바라보면서 아, 이렇게 멋없는 재회를 상상한 건 아니었는데 싶었지만요.’






에스테는 멍하니 끝없는 우주를 바라보았다.

목표로 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에스테는 자신이 구한 아이를 떠밀고 우주선으로 돌아와 이 근방을 얼마간 맴돌았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정우와 나눴던 대화들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이곳저곳에 아무렇지 않게 흩어져 버린 모든 조각들이 조금씩 제 짝을 찾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에스테는 확신했다. 자신은 정우의 삶을 관통하고 있다고. 자신의 삶은 노년기의 정우를 발견하고, 유년기의 정우를 구출하며 결국 자신이 그리워하는, 자신 옆의 정우는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있는 것이라고.


에스테는 또한 떠올렸다. 지난 시간 동안, 미치광이에 의해서 길러졌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인 채, 스스로의 삶을 저주했던 나날들을. 그러자 그가 에스테에게 이름을 지어주며 건넨 말들이 갑자기 머릿속에서 선명하고 빠르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네 이름은 에스테야. 내가 발견한 행성의 이름이거든? 너랑 정말 닮았어.’


그리고 그의 말은 자신이 들었던 다른 말과 겹쳐졌다.


‘눈이 이렇게 맑고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봐요. 정말 과장이 아니라, 멀리서 봐도 우주선에 앉아 있는 선배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요. 그럴 땐, 뭐랄까 그런 느낌이에요.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미지의 행성을 드디어 발견한..? 행성 탐사원들은 모두 이런 느낌을 받을 게 분명해요.’


두통이 일었다. 에스테는 모든 걸 쏟아내고 싶었다. 자신의 뇌를 입으로 뱉어내고 싶었다. 희미했던 유년기의 기억이 발광했다 점멸하며 자석처럼 현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에스테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짚으며 조금씩 선명해지는 과거의 한 시점을 바라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끊임없는 두통이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무릎을 꿇고 고개를 떨군 채로 바닥을 응시하는 순간, 에스테의 귀에 어떤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유일한 가족이 누군가 했더니 바로 너로구나, 에스테.’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였다.


‘이것저것 복잡한 행정은 아저씨가 맡아서 도와주마. 명복을 빈다.’


자신과 함께 살았던 미치광이 언니가 죽은 이후, 복잡하고 귀찮은 일을 도맡아 해결해 주고 홀연히 떠난 아저씨. 에스테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근원을 좇았다. 누군가 에스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 색이 다 바랜 점프슈트, 필터 끝까지 태운 담배를 물고 있는 곱슬머리의 왜소한 노년의 남성.


그건, 에디였다.


에스테는 소리쳐 에디를 부르려 했지만 목구멍에 무언가 꽉 막힌 듯, 새된 신음소리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안다, 알아. 얼마나 슬프겠니.’


그게 아니야, 에디. 나는,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 에스테는 온 힘을 다해 그를 잡으려고 했지만 그는 너무 멀리 떨어져 에스테를 바라보고 있었다. 늙은 에디는 마치 어린아이를 어르듯 말을 이었다.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짐을 챙기자. 너처럼 어린아이가 무법천지인 우주 정거장에서 굴러다니도록 둘 수는 없으니.



분명 정우도 그걸 바랄 거야.

이전 05화 먼지보다 가벼운 기록 0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