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에이씨, 쪼잔한 혼혈놈.”
거구의 백인 남성이 점프슈트를 입은 남성의 멱살을 잡더니, 이내 거칠게 내려놓고는 사무실을 떠나갔다. 잠시 비틀거렸던 에디는 덤덤한 얼굴로 옷을 턴 뒤, 태블릿에 이름을 기록했다. 에디는 불만사항을 기재했다. 지시사항 불이행과 차별금지법에 반하는 모욕적인 언사. 이런 이들은 언제나 있었다. 형편없는 쓰레기들을 가져와 놓고 비싼 값의 수당을 바라는 염치없는 이들. 수없이 많은 불만사항을 기재해봤자 변하는 것 없었지만 그렇다고 에디 혼자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이렇게 형식적일 뿐이라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에 에디는 만족했다. 그럼에도 목덜미까지 벌게진 스스로의 흥분과 분노를 억제하는 데 아직은 힘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님에도 누군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비치는 혐오는 언제나 그의 심신을 갈가리 찢는 것 같았다.
“왜 가만히 있어요?”
이미 자신의 키까지 훌쩍 커버린 아이가 말했다. 몇 년 전, 기항지로 날아들어온 작은 구명정에서 발견한 아이였다. 당시에 아이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에디는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미아보호소나 보육원에 보낼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사방에 문의를 넣으며 갑자기 제 손에 맡겨진 혹덩어리를 빠르게 치워버리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에디는 알고 있었다. 이 어린 동양인 여자아이가 믿을만한 증명서나 자격 없이 내던져질 세상이 얼마나 차갑고 비참하게 다가올지.
무엇보다 아이는 정우와 에스테를 생각나게 했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에디 역시 얼추 알고 있었다. 자신보다 더했다면 더할 고통을 느끼며 살아왔을 친구들. 이제는 둘 다 자신 곁에 없다. 실종된 정우와 그를 찾으러 떠난 지 몇 년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연락이 없는 에스테. 그들은 먼지처럼 사라졌다. 정말 거짓말처럼. 누군가 거추장스런 먼지를 털고 불며 우주로 보내버린 것처럼.
“긁어 부스럼 만들 바에야 좋을 것 없어. 저 인간 한 명 잘렸다고 달라질 게 있을 것 같니. 결국 똑같은 놈으로 채워져. 매일 같이 실종되고 죽는 게 기사들인데, 또 매일 같이 보충되는 소모품이 바로 기사들이야.”
아무렇지 않다는 듯 에디는 답했지만 아이는 잠자코 이 주제에 대해서 대화를 끝내길 원치 않는 듯 했다.
“분하잖아요. 저 사람이 잘못한 거잖아요. 아저씨가 잘못한 거 없잖아요.”
에디는 피식하며 웃음이 나왔다. 에스테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배알도 없는 친구라며 그 자리에서 에디에게 무례한 언사를 행한 기사와 바로 주먹다짐을 하던 녀석. 가끔씩은 에스테를 떠올리게 하는 이 아이에게, 어른답지 않게 기대고 싶기도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미 많은 혼란과 외로움으로 자기만의 짐을 가지고 있을 아이였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아이의 정보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찾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에디에게 주어진 건 고작 회사에서 제공하는 데브리 회수 기사들의 정보뿐이었으니까.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잠자리를 내어주고 옷을 입혀주며 아이가 무슨 말을 하기를 기다렸지만 얼마 간 아이는 아무런 말 없이 그저 에디가 제공하는 것을 받기만 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다. 에디는 에스테와 정우를 찾기 위해 집에 와서도 조사를 계속했다. 웜홀에 대한 조사를 할 만큼 전문적인 지식이 풍부한 것은 아니었으나 알음알음으로 알게 된 이론과 사례를 이용해 에디는 가설을 세우기 시작했다. 둘은 실종되어 우주 어딘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웜홀에 들어간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무것도 에디가 밝혀낸 것은 없었다. 그 사실이 에디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정우야.
의자에 앉아 기지개를 켜며 에디가 무심코 내뱉은 혼잣말에 반응한 것은 아이였다. 아이는 쪼르르 다가와 그의 곁에 서서 귀를 쫑긋 세웠다. 정우. 두 음절을 말할 때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아이의 이름은 정우가 되었다. 아이를 정우라고 부르면 부를수록, 그러면서 아이의 키가 한 뼘씩 자랄수록 본래 에디가 알던 정우에 대한 기억은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정우를 찾아 떠난 에스테의 기억 역시 에디의 안에서는 뽀얗게 먼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나는요, 아저씨처럼은 살지 않을 거예요. 빡치는 게 있으면 빡친다고 말할 거고, 억울한 게 있으면 얻을 때까지 치고받을 거라고요.”
정우는 한껏 에디에게 쏘아붙이고는 먼저 나간 백인 남자와 다를 것 없이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에디는 정우에게 따끔하게 한 마디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저 또다시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저 아이가 저렇게 당당하게 커 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낯을 가리는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가르쳐주지 않아도 곧잘 예의 바르게 행동하던 아이였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에디의 일터에 눌러앉아 스스로 무언가를 찾고 공부하기 시작하더니 저렇게 딱 부러지는 아이가 되어주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 정우는 웬만한 어른들은 내려다볼 만큼 키가 컸다. 그에 비해 에디는 하염없이 쪼그라들었다. 정우는 다른 무엇보다 우주로 나아가는 것을 꿈꿨다. 언젠가 에디가 이다음에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을 때, 운명의 장난인지, 정우는 데브리 회수 기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에디가 이유를 묻자 정우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찾아야 될 사람이 있어요. 난 분명히 기억해요. 나를 구해준 그 우주인을 반드시 찾을 거예요. 그 사람이 얼마나 늙었든, 얼마나 멀리 있든, 설령 죽었다고 해도.’
그렇게 정우는 수십 번의 출장을 다녀왔다. 에디가 혹시 몰라서 남겨 놓았던, 어린 시절의 정우가 타고 착륙한 낡은 구명정에 입력된 출발 지점의 좌표계를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러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125번째의 출장을 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