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토리망자 Sep 24. 2024

먼지보다 가벼운 기록 09

09.


“할머니는 또 망루에 나가 계시니?”


루디는 자판을 두드리다 안경을 내려놓고 이제 막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손녀에게 물었다. 손녀는 대충 그런 것 같다며 대꾸하고는 제 할 일을 찾아 그의 시야를 벗어났다.


이제껏 잊은 채로 잘 살아가는 것 같더니 요새 다시 병이 도진 모양이라고 루디는 생각했다. 루디는 이십 년 전, 오래된 데브리 회수 우주선을 이끌고 돌아온 에스테를 떠올렸다. 약간의 탈수 증세와 불안 증상이 겹쳐져 있던 에스테는 오래도록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잠에서 깨곤 했다. 아무런 정보도 없는 여자였다. 지문도, 홍채도, 여타의 생체정보도 회사의 기입된 기사들의 정보와 일치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셈이었던 그에게 어쩐지 루디는 마음이 쓰였다. 능숙하게 우주선을 조종하는 것으로 보아 다른 지역에서 데브리 회수 일을 하다 그만 길을 잃은 여성인 것 같았다. 어느새 샛노랬던 머리카락은 세월을 몸소 보여주듯 하얗게 세었고, 형형히 빛나던 밝은 연갈색 눈동자는 흐릿한 안개가 끼었지만 그만큼 에스테의 악몽과 불안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게 서로를 의지해가며 오랜 세월을 함께 했건만, 아직도 에스테에게는 루디가 이해할 수 없는 미련이 남아 보였다. 에스테는 기항지 가장 높은 곳에서 아무런 말 없이 하루 종일 우주만을 바라보았다. 루디가 직접 찾아가면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곁으로 돌아오곤 했지만 에스테는 조금씩 이십 년 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듯했다.


루디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이끌고 사다리를 타서 망루에 올랐다. 감자수프가 식기 전에 데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망루 끝에 다다른 루디의 눈에 에스테는 없었다. 이이가 또 무슨 변덕이 올랐나 싶었다. 다른 장소를 찾았을까. 우주가 좀 더 잘 보이는 곳으로 간 것일까. 그때 망루 뒤편에 있는 기항지에서 우주선의 굉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작은 소형 데브리 회수 우주선이 미약한 불빛을 뿜으며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루디는 아무 말 없이 데브리 회수 우주선이 기항지를 떠나 우주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정거장을 뒤덮는 불꽃놀이가 조금씩 어둠을 향해 나아가더니 작은 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냥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자그마치 이십 년이 흘렀고 오늘은 7월 26일이었으니까. 이제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루디를 사랑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손녀인 루시아 역시 그랬다. 하지만 에스테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따로 있었다. 에스테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존재한 적도 없던 사람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러나 에스테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이십 년 전, 유일하게 자신의 우주선에 입력되어 있던 좌표로 돌아가는 일뿐이었다.


우주는 참을 수없이 고요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에스테의 우주선 창문 너머로 지구를 닮은 행성과 우주정거장이 발하는 각양각색의 불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격렬히 몰아치던 파도가 가까스로 잠잠해진 뒤, 길을 잃은 배를 향해 지평선을 가로지르는 등대의 불빛처럼. 이제는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정우를 향한 그리움 때문에 아프지는 않았지만, 이 순간에 이르자 주름진 에스테의 눈두덩이로 눈물이 한두 줄기씩 길을 내기 시작했다. 기대해선 안되는 만남을, 그럼에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에스테는 원망했다.


그는 다리를 쭉 뻗고 양 손아귀를 꽉 쥔 채, 눈을 감았다. 그는 천천히 궤도를 따라 자신의 우주선이 광활한 우주 한복판을 천천히 유영할 수 있도록 엔진의 시동을 꺼버렸다. 아주 잠깐 사이에 죽을 수 있다면. 그리고 나도 너처럼 발견될 수 있다면.



얼마나 오래 잠에 들었을까.


에스테는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었다.

에스테의 귀에 일정한 리듬으로 건조한 기계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