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도 구원이라 생각하는 날이 올 거야
눈이 자연스럽게 떠졌다. 출근 준비를 하듯 몸이 자동으로 반응한 탓에, 낯선 곳임에도 불구하고, 휴가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마음 한편엔 여전히 무언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이 스며들었다. 다행히 인터넷이 잘 터지지 않아 그 감각에 점점 무뎌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열어 팀즈를 확인하며 아침이 반복되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자고 있던 숙소 안에서 조용히 일어나,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밖으로 나왔다. 구름이 가득한 몽골의 아침이 눈앞에 펼쳐졌다. 새로 산 파란 아노락을 주섬주섬 꺼내 입고, 짜야가 준비해 준 참치와 김치가 들어간 뜨끈한 죽 한 그릇을 먹었다. 딸기우유로 대충 때우던 일상과 달라, 일상에서 벗어났음을 즐기기 시작했다.
홉스골을 향한 여정이 다시 시작됐다. 어제와 다른 새로운 사람들과 푸르공에 탔다. 좁은 차 안은 여전히 불편했지만, 그것도 점점 익숙해졌다. 가벼운 대화와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교차됐다.
세상 살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중에는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사람도 있다. 내게 굳이 MBTI로 설명하자면, 주로 이 유형들의 사람들이 속한다. ENTP, INTP, 그리고 ISTP. 그들과 대화할 때면, 웃거나 멍해지거나, 때론 혼란스럽다.
ENTP는 예측 불가의 대가라 예기치 못한 반응에 웃음이 터지고, 정신없이 대화를 나누다 보면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가 버린다. 반면 INTP는 또 다른 차원에 있어 쥬만지 같은 세계에 끌려 들어가 그들의 사고의 미로 속에 빠져드는 기분이다. 그리고 ISTP, 세상 반대편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내 이야기를 다 털어놓으면, 그중 한두 마디만 기억해 줘도 다행이다. 그들과의 무심한 대화가 묘한 매력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난 또 말을 걸고 있다.
오늘 옆자리에 앉은 지윤이는 INTP였다. (단번에 맞춘 건 아니고, 단검 때문이었다. 여행 기념품으로 단검을 샀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화는 많이 달랐지만,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했을 때 서로 닮아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지윤이에게 여행 중 요즘 자주 듣는 노래를 물었고, 그녀는 요네즈 켄시의 ‘레몬’이라 답했다.
지윤이와 나는 노래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이별에 대한 생각을 나누었다. 둘 다 이별을 경험한 적이 있었기에 그 감정은 어색하지 않았다. 레몬의 ‘지금도 당신은 나의 빛이야’라는 가사를 되뇌었다. 이별 후 상대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 함께한 시간이 빛이라 말한 거 아닐까.
사랑했던 사람을 완전히 잊는다는 건 힘들 일이다. 기억의 조각을 억지로 빼내다 보면 결국에는 거짓말이라는 다른 조각으로 과거를 끼워 맞춰야 했다. 그래서 바꾸지 않고 그 조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오길 기다리기도 했다. 만남이 구원이 되는 순간처럼, 이별도 구원이 되는 순간이 온다고 믿는다. 그 순간, 가사처럼 삶을 비추는 가벼운 빛이 되겠지.
마트에 들러 점심을 챙기고, 간단하게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잠시 쉬었다. 가벼운 단맛이 여행 중간에 작은 여유를 주었다. 비가 내리던 중간에 잠시 멈춰 기념품을 고르고,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지는 틈에 사진을 찍었다. 그 순간들이 모두 특별하게 느껴졌다. 빗속의 풍경은 몽골의 차분한 분위기와 어우러져 더 깊이 남을 장면이 되었다.
한참을 달려 마침내 홉스골에 도착했다. 긴 여정 끝에 마주한 호수의 깊고 맑은 물은 차 안에서의 누적된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구름을 피해 달린 건지 홉스골의 하늘은 맑게 개어있었다. 이곳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특별한 순간이었지만, 지윤이와 대화를 하며 떠오른 생각은 더할 나위 없이 의미 있는 하루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