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OK #5 장국영을 좋아하지만, 제 인생영화는 말이죠..
새로운 사람들과 어색함을 깨기 위해 아이스브레이킹을 할 때, 우린 때론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혹시 영화 좋아하세요? 좋아하신다면 어떤 영화를 좋아하세요?"
만약 미래의 나에게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나는 주저 없이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라고 답할 것이다.
홍콩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알겠지만, 장국영은 화양연화에서 만나볼 수 없다.
.
.
.
.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진짜 친한 친구와의 첫 만남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사실 내가 홍콩, 홍콩영화에 빠진 정확한 시기/이유가 기억이 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왕가위 감독 영화에 빠지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장국영이라는 배우를 알게 되어 존경/좋아하게 되어 인생이 바뀌었고(다양한 의미로), 또 그것을 계기로 다른 홍콩영화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말이다.(사실 80%가 왕가위 감독의 영화이다)
, 인생영화는 화양연화입니다.
서론이 길어졌지만, 화양연화는 양조위와 장만옥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인데, 단편적으로는 불륜을 주제로 담은, 하지만 그 한 문장으로는 감히 모든 걸 설명할 수 없는 왕가위 감독의 특유의 감성, 한 곡도 버릴 게 없는 OST, 가슴 아픈 스토리 3박자가 완벽한 영화다.
그래서 왜 이 영화를 좋아하냐고?
내 기준에서 왕가위 감독 특유의 색감이 제일 잘 들러나는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색으로 표현한다면, 내게 화양연화는 빨간색이고 옷차림으로 표현한다면 내게 화양연화는 클래식 style이다.
그렇기에 화양연화의 주인공인 주모운(양조위)과 수리 첸(장만옥)의 대사 비중이 다른 영화에 비해 대사의 비중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인생영화가 되어 2~3년 전부터 매년 크리스마스시즌에는 이 영화를 보는 게 나의 연례행사가 되었다.
2022년에는 방 안에 있는 데스크톱을 통해, 작년 2023년 크리스마스에는 거실에 있는 TV를 통해 영화를 관람하였다. 특히 대표 OST인 Quizas Quizas Quizas가 나왔을 때, 무심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었는데 티비 옆에 설치해 두었던 미니트리가 OST의 박자에 맞춘 듯(나만의 착각인 것이 확실하지만) 잔잔히 바뀌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서 그들의 흔적이 더 사라지기 전에, 장국영 님의 흔적을 찾아 떠난 것처럼 그곳을 찾아야 하는데 사실 화양연화는 굉장히 다양한 나라에서 촬영을 했던 터라 한 번에 이동하기가 쉽지 않다.
주모운과 수리 첸의 만남의 장소이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촬영된 공간이기도 한 골드핀치레스토랑은 추억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이며,
주모운이 영화 말미에 사원 기둥의 구멍에 속삭이며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곳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수리첸과 양조위가 이별연습을 하던 곳은 태국 방콕의 올드타운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곳에서 촬영을 한 영화라 쉽지는 않겠지만.. 언젠가 화양연화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넉넉히 한 달은 잡아야 할 것 같다. 물론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만약 내가 수리첸이라면, 만약 내가 주모운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이라는 생각을 해보곤 했다.
"먼지 낀 창틀을 통해 과거를 희미하게 보고 싶지 않기에 할 수 있는 한 상대방을 꽉 잡아볼 것이라고. 티켓을 직접 티켓을 건네며, 나의 마음을 솔직히 표현을 했었을 것 같다"는 매번 같은 결론을 내렸기는 했지만 말이다.
ㅡ
만약 내가 혼자 만들어낸 또 다른 결말처럼 영화가 진행되었다면,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내가 느끼는 그 진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을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더욱 여운이 남는 것은 아닐까?(물론 2024년을 살고 있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혼자서 수많은 또 다른 화양연화의 결말을 써 내려가도 결국엔 원래 결말로 돌아오고 나서야 내 무한상상력은 끝이 난다.
2024년 10월 19일 새벽, 방한켠에서 화양연화 OST LP버전의 곡을 들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