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올린 골프장은 평생 다시 가지 못한다.”
어느 라운드 뒤풀이에서 들은 이 한마디에, 괜히 혼자 고개를 끄덕였던 적이 있다. 근거는 없지만, 어쩐지 그럴싸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나 역시 아직도 그 골프장에 다시 가본 적이 없다. 스레드에 글을 올렸더니 반은 동의했고 반은 낭설이라는 댓글이 달렸다. 동의하든 안 하든 머리 올린 골프장은 누구에게나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는 건 분명하다. 머리 올린다는 표현은 골프에서 초보자가 처음으로 18홀 라운드 끝냈다는 축하의 의미를 지닌 은어다.
나 또한 머리 올린 날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커리어 중반쯤 친한 선배회사에 합류한 적이 있다.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배의 권유로 골프를 시작했다. 비즈니스 반, 취미 반의 이유였다. 입문할 때부터 든든한 조력자는 그 선배였다. 중고 클럽도 선배가 사줬고, 새벽마다 함께 레슨을 받았다. 출근 전 연습장이 우리 둘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첫 라운드를 나가게 되었다. 날짜는 12월 16일. 여름에 첫 레슨을 받았고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첫 라운드는 겨울이었다. 장소는 ‘골드 CC’. 서울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 도착한 골프장엔 첫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날은 춥기도 했지만, 더 기억에 남는 건 내 ‘몸’이었다. 샷을 할 때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 실력이랄 건 없었지만 그것 때문이 아니라 긴장감 때문이었다. 초심자의 행운인지 몇 개의 파를 하긴 했지만, 더블보기, 트리플, OB, 쓰리퍼팅까지 나올 건 다 나왔다. 입문자의 첫 라운드라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첫 라운드의 스코어는 ‘114’. 라운드가 끝난 후, 선배는 내 스코어카드에 이렇게 적어주었다.
“프로 되지 마라”
첫 라운드치곤 꽤 준수했는지 프로들도 살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한 줄의 농담은 그날의 하이라이트였다. 기분이 좋았다. ‘내가 골프 신동인가?’ 싶을 만큼. 누구나 첫 라운드를 치고 나면 듣는 말.
"너, 소질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말은 10에 9는 그냥 ‘기 살려주려고 하는 멘트’였다. 그래도 그때는 몰랐다. 믿고 싶었고, 그래서 기뻤다. 그 이후에도 나는 꾸준히 골프를 쳤다. 연습장도 자주 갔고, 다른 골프장도 여러 번 다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희한하게도 골드 CC에는 단 한 번도 다시 가지 않았다. 특별히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지리적으로 먼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마치 그날의 설렘과 긴장을
그곳에 그대로 남겨두고 온 것 같은 기분. 돌아가면, 그 감정들이 엉켜버릴까 봐 무의식적으로 피해왔던 걸지도 모른다.
그 시절 나는 수지에 살았고, 근처 연습장에 새벽마다 들렀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출근 전에 몸을 풀고 나서야 하루가 시작됐다. 잘 치려고 했던 것도 있지만, 그저 그 시간과 나의 열정이 좋았다. 노력하는 나, 뭔가에 빠져 있는 나. 그 자체로 뿌듯했다. 골프를 하며 만나는 ‘첫’들은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첫 버디, 첫 OB, 첫 100타, 첫 싱글, 첫 언더… 그리고, 첫 골프장. 다른 건 시간이 지나면 기록으로만 남지만, 첫 골프장은 묘하게 감정으로 남는다. 지금까지 가보지 않았지만, 그곳은 내 골프 인생의 첫 페이지였다.
머리 올린 골프장은 평생 다시 가지 못한다? 어쩌면 이건 낭설일지 모른다. 누군가는 첫 라운드에 너무 고생해서 다시는 안 가겠다고 할 수 있다. 또 나처럼 어쩌다 보니 안 가게 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좋은 기억이든 싫은 기억이든 그날의 첫 설렘을 그 장소에 그대로 남겨두고 싶어서 그동안 안 갔던 건 아닐까 추축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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