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쯤이었다.
분당 태재고개 너머에 있는 골프연습장에 자주 다녔던 시기였다. 사부 프로에게 레슨도 받고 연습장 내에 있는 파3 코스도 자주 다니던 시절. 오래전부터 사부 프로는 주니어 선수들만 레슨해 오셨는데 일반 성인들을 데상으로 하는 레슨 아카데미까지 확장하려던 차에 내게 좋은 네이밍을 의뢰해 오셨었다. 네이밍을 하기 위해 몇 가지 체크사항들을 떠올렸다. 주니어 선수들과 아마추어의 골프 시작점은 사뭇 다르다. 피지컬도 다르고 마음가짐도 다르다. 아마추어는 일단 허리가 유연하지 않다. 직업도 따로 있다. 그래서 골프가 일상의 활력도 되지만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쉽게 매력을 느끼다가도 쉽게 떠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다양한 변수와 상황을 고려해야 했다. 고민하다가 내가 제안한 아카데이 네이밍은 바로 <깨는 골프>였다. 120타 나아가 100타를 깨고, 90타를 깨고, 80타를 깨는 것. 끝내는 라운드마다 자신의 라이프 베스트를 깨는 것. 골프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정해진 틀을 깨고, 스스로의 한계를 깨는 것이라는 설명도 해드렸다. 프로님은 마음에 든다고 엄지 척을 해주셨다. 아는 업체에 의뢰해 엑스 배너도 제작해 드렸다. “깨!”라는 짧고 강렬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속어로 “너 정말 깬다!”라는 말도 있듯, 그 말에는 역동성과 반전의 에너지가 있었다. 깬다는 단어는 골퍼에게 목표이기도 하고 한계로 인식되기도 한다.
골프를 하다 보면 늘 벽이 눈앞에 나타난다. 초보 때는 연습할 때마다 벽을 느낀다. 실내연습장 내부의 천막 벽이 아니다. 골프에 소질이 없나 하는 좌절의 벽이다. 그만큼 입문 시기에 느끼는 벽은 거대하다. 그 거대한 벽 일부를 깼을 때의 기쁨이란... 생애 첫 라운드의 좌절과 희열은 묘한 동기부여를 선사한다. 제 아무리 타고난 천재도 100타 이상을 경험하게 된다. 생초보 기간을 간신히 벗어날 때 나타나는 벽은 바로 100타의 벽. 겨우겨우 공을 맞추다가도 스코어는 늘 세 자리다. 하지만 어느 날 99타를 기록하면 세상이 달라진다.
“아, 나도 드디어 세 자릿수를 깼구나!”
그래 이 맛이야! 김혜자 선생님의 영원한 광고 카피처럼 골프의 맛을 알듯 말 듯 체험하게 된다. 벽은 계속 이어진다. 이후엔 90타의 벽이 기다린다. 안정적으로 보기플레이를 할 수 있어야 넘어설 수 있다. 안정적인 보기플레이가 어디 쉬운가. 매홀 보기로 홀아웃해야 하는 대단한 스코어다. 연습도 재미있고 나름 왕초보에게 레슨도 해줄 수 있는 실력을 보유하는 시기다. 그다음은 80타의 벽. 여기부터는 진짜 ‘골프다운 골프’를 해야 한다는 말이 따라붙는다. 매너도 챙겨야 한다. 품격을 갖춰야 80대 벽을 깼을 때 동반자들의 리스펙을 받는다. 스코어뿐만이 아니다. 벙커샷을 깨고, 러프 탈출을 깨고, 드라이버 슬라이스를 깨야 한다. 한마디로 다 잘해야 한다. 싱글 핸디캡은 아마추어에게 머나먼 손 닿지 않는 신기루 같은 벽일지도 모른다. 싱글이라는 벽을 깼을 땐 작은 깨달음들이 모여서 골퍼를 단단하게 만든다.
이처럼 골프에서 ‘깨는 맛’은 달콤하다. 그러나 그만큼 좌절도 깊다. 한 번 잘했다고 해서 계속 잘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애증의 골프다. 밀당도 이런 밀당이 없다. 어제 89타를 치고 기뻐했는데, 오늘은 다시 97타가 나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내가 그날 운이 좋았던 걸까?”라는 의심이 밀려온다. 하지만 바로 그 좌절을 깨는 순간이 찾아온다. 꾸준한 연습 끝에 다시 80대를 기록하고, 또 그 기록을 반복하면서 진짜 실력이 된다. 좌절과 극복의 반복, 바로 그 과정이 골프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힘이다. 친한 프로님은 골퍼의 연습과 열정을 이렇게 비유하시곤 했다. '손톱이 자라는 순간이 눈에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보면 길게 자라 있다.' 연습과 노력은 그런 것이다. 기쁨과 좌절의 반복 속에 실력이 성정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골프의 골자도 싫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 돈 주고 왜 사서 스트레스를 받냐는 것이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심한 좌절을 경험하던 초보시절 어느 날, 라운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논두렁에 골프백을 던져버렸던 적이 있었다. 이천에 있는 골프장 근처였고 어두운 밤길이었다. 다시는 골프 안 한다는 말은 온데간데 없이 다음 날 아침이 밝자 곧바로 이천 논두렁으로 차를 몰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골프백은 도로 아래에 처박혀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다시 차를 돌리게 만든 힘은 무엇이었을까. 깨는 맛을 잊지 못함 아니었을까 싶다.
깨는 행위에는 단순한 기록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한계를 깨는 건 곧 자신을 새롭게 정의하는 일이다.
초보 때는 “공만 맞으면 좋겠다”가 목표였다. 그러다 100타를 깨고 나면, 목표는 “보기플레이”로 바뀐다.
또 90타를 깨면, 파 세이브를 꿈꾸고, 버디를 노리게 된다. 깨는 순간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자신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감각하게 된다. 결국 깨는 행위는 ‘성장’을 가시화하는 과정이다. 골프에서 우리는 수많은 벽을 만난다. 하지만 그 벽은 단순히 점수를 위한 장벽이 아니다. 삶의 한 부분을 닮아 있다. 관계에서도, 일에서도, 건강에서도 우리는 늘 벽에 부딪힌다. 성격의 한계를 깨야 하고, 두려움의 벽을 깨야 하고, 오래된 습관을 깨야 한다. 그때마다 좌절하고, 후회하고, 또다시 도전한다. 골프는 그 과정을 압축해 보여주는 스포츠다. 스코어카드에 기록된 숫자 하나가 나의 한계와 성장, 좌절과 극복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골프의 진짜 매력은 ‘깨는 맛’에 있다. 스스로를 깨고, 어제를 깨고, 지금의 나를 깨라. 어제의 기록에 머물지 말고, 오늘의 한계를 깨고 나아가라. 그 과정에서 골프는 더 깊어지고, 삶은 더 단단해진다. 골프도, 인생도 결국 깨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순간이 우리가 다시 클럽을 쥐게 만드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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