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슬로건을 만들어왔다. 브랜드를 어떻게 한 문장으로 요약할 것인가. 광고 회사에서 가장 많이 던졌던 질문이자, 동시에 가장 무겁게 느껴지는 숙제였다. 회의실 안 풍경을 떠올려본다. 긴 직사각형 테이블, 빔프로젝터 화면에 띄워진 수십 개의 카피안. 벽과 흰색 보드칠판에 덕지덕지 붙여진 A4용지들.
용지가 많이 붙여질수록 왠지 모르게 일을 열심히 한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었다. 슬로건은 백사장의 보물 찾기와 같다. 찾았다 해도 거쳐야 할 관문이 많아 설득하는 과정이 더 어렵기도 한 작업이다.
“피부에 와닿게”
“선영아 사랑해”
“스타일리시 퍼포우먼스”
서로의 노트북 화면에 줄지어 나열된 문장들이 하나씩 공유된다. 회의실 공기는 무겁고, 담당 CD의 표정은 예민하다. 한 단어가 바뀌면 의미가 달라지고, 의미가 달라지면 수억 원의 캠페인 방향이 흔들린다.
그렇게 몇 주를 갈아 넣어야 겨우 하나의 슬로건이 뽑힌다. 그 시절, 슬로건은 전부였다. 신문, 잡지, 라디오, TV. 4대 매체가 지배하던 시대에는 브랜드가 내세운 슬로건이 곧 대중의 기억이 됐다. 광고는 일방향으로 송출됐고, 소비자는 수용자였다.
“Just Do It.”
“Think Different.”
“Impossible is nothing”
"Enjoy your style"
브랜드가 세상에 내미는 이 짧은 문장들은 신호였고, 무기였고, 곧 매출이었다. 슬로건은 LP판의 A면 트랙처럼 반복 재생되며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들었다. 카피라이터는 무대 위의 작곡가와 같았다.
지금은 어떨까. 광고를 둘러싼 환경의 많은 것이 달라졌다. 슬로건은 더 이상 브랜드를 좌우하는 절대무기가 아니다. 미디어 환경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광고 메시지는 더 이상 독점적이지 않다. 소비자는 언제든 검색하고, 비교하고, 리뷰를 남길 수 있다. 수백억짜리 캠페인도 유튜브 댓글 한 줄에 흔들린다. 네이버 후기,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배달앱 별점이 브랜드의 운명을 좌우한다. 사람들은 이제 화려한 슬로건보다 누군가 남긴 생활 속 후기에 더 귀를 기울인다.
“배송이 빨랐어요.”
“아침에 늦었을 때 이거 하나로 버텼다.”
“생각보다 속이 편했다.”
브랜드가 수십억을 들여 만든 화려한 언어보다 소비자가 무심히 남긴 이 한 줄이 더 설득력이 있다. 광고가 약속이라면, 후기는 증거다. 시장은 이제 약속보다 증거를 요구한다.
나는 카피라이터로서 이 변화를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고 느끼고 있다. 한 번은 대형 식품 브랜드 슬로건 개발 프로젝트였다. 회의실에 모인 임원, 기획팀, 제작팀. 열띤 논의 끝에 슬로건 하나가 최종 선택됐다. 전국 캠페인으로 쏟아져 나갔다. 하지만 소비자 리뷰에 달린 말은 단순했다.
“아침에 늦었을 때 이거 하나 먹으니까 버틸 만했다.”
“다른 건 모르겠고 속이 편했다.”
회의실에서 몇 주를 고민한 언어보다, 리뷰에 달린 이 짧은 한 줄이 제품의 진짜 가치를 더 정확히 말하고 있었다. 또 다른 경험도 있다. 금융 광고 캠페인에서 강력하고 임팩트 있는 슬로건을 만들었다. 화려한 영상미, 유명 모델 캐스팅, 수십억의 집행. 하지만 신규 가입자를 끌어온 건 광고가 아니라 앱스토어 후기였다.
“앱이 안 튕겨서 좋다.”
“계좌 개설이 생각보다 빨랐다.”
음료 브랜드의 사례도 비슷하다. 슬로건은 짧고 간결해서 기억하기 쉬었지만, 소비자가 남긴 말은 훨씬 솔직했다. “술 마신 다음 날 이거 마시니까 속이 덜 쓰리더라.”
결국 이 짧은 후기가 매출을 움직였다. 나는 수십억짜리 캠페인이 시장에서 리뷰 한 줄에 무너지는 걸 수없이 봐왔다. 슬로건을 탄생시키는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브랜드를 정의하는 건 우리가 만든 슬로건이 아니라, 소비자의 경험이라는 사실.
그렇다고 슬로건이 무의미해진 건 아니다. 슬로건은 여전히 브랜드가 세상에 던지는 약속이다.
단, 약속만으로는 부족하다. 약속이 증거와 만날 때 비로소 힘을 가진다. 카피라이터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제 달라졌다. “내가 만든 문장이 훗날 소비자의 후기 언어로 반복될 수 있을까?” 후기와 이어지는 슬로건만이 살아남는다. 후기와 맞닿지 못한 슬로건은 공허하다. 슬로건은 브랜드의 의도된 언어, 후기는 브랜드의 의도되지 않은 언어다. 의도되지 않았기에 더 진실하다. 약속과 증거가 맞아떨어질 때, 브랜드는 진짜 힘을 갖는다.
A면 트랙은 언제나 화려하다. 메인 싱글처럼 세상에 울려 퍼지고, 많은 주목을 받는다. 슬로건이 그렇다.
하지만 나는 B면을 더 믿는다. 숨겨진 트랙, 작은 언어, 소비자의 짧은 한 줄. 그게 브랜드를 오래 남긴다. 광고 회사에서 수십억을 들여 만든 언어보다, 소비자가 남긴 생활의 언어가 브랜드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나는 슬로건보다 후기를 좋아한다. 약속보다 증거를, 무대 위의 언어보다 무대 뒤의 언어를, A면보다 B면을. 바로 그 지점이 오늘날 브랜딩의 기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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