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통과 깍두기통 사이에서 발견한 브랜드의 힘
일주일 전쯤이었나. 종로에 들른 날이었다. 백일 반지를 맞추러 간 길에, 점심시간이 겹쳤다. 자연스레 스마트폰을 켜고 근처 맛집을 검색했다. 익숙하게 ‘곰탕’, ‘설렁탕’ 같은 키워드가 떠올랐고, 그중 한 노포집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지하철역에서 가까운 집이었다. 도보로 1분여. 검색창을 통해 발견했지만, 막상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검색 결과와는 전혀 다른 시간이 펼쳐졌다. 낡은 간판, 좁은 입구, 연식이 꽤 된 나무 의자와 테이블. 나이 지긋하신 이모님들과 카운터를 지키시는 푸근한 인상의 여사장님. 그리고 공기마저 오래된 국물 냄새가 배어 있었다. 아, 여기는 세월을 품은 집이구나. 그런데 그 순간 내 시선이 멈춘 곳은 의외였다. 바로 테이블 위에 놓인 김치통과 깍두기통이었다.
대한민국 노포집을 다니다 보면 신기할 정도로 비슷한 풍경을 목격하게 된다. 커다란 항아리 모양의 김치통, 같은 모양의 깍두기통. 그 안에는 푹 익은 배추김치와 매콤 달콤한 깍두기가 담겨 있다. 대체로 직접 담근 반찬들이 항아리에 담긴다. 덜어 먹을 수 있도록 집게와 국자가 꽂혀 있는 것도 거의 공식처럼 이어진다. 특히 곰탕이나 설렁탕 같은 국물 요릿집에서는 이 세팅이 빠지지 않는다. 동네 오래된 순댓국집에도 비슷한 세팅을 보곤 한다. 반찬을 미리 접시에 담아 가져다주는 대신, 손님이 먹을 만큼 알아서 덜어 먹는 방식이다. 어떤 이는 ‘인심’이라 말하고, 어떤 이는 ‘편리함’이라 말한다. 나는 여기에 ‘노포만의 국룰’이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김치통과 깍두기통을 마주하면, 이상하게도 기억이 되살아난다. 직장 초년 시절, 월급날이면 팀 선배들이 이끌고 들어가던 설렁탕집(첫 회사는 종각역 근처였다). 그날도 김치통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고, 나는 집게를 서툴게 다루며 접시에 옮겨 담았다. 그 김치를 얹어 밥을 말아먹을 때의 따끈함이 아직도 기억난다. 또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갔던 국밥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꽤 오래된 설렁탕 맛집이었는데 지금은 문을 닫았다). 아버지는 국물을 떠먹기 전, 늘 먼저 깍두기를 집어 입에 넣으셨다. “깍두기 맛이 좋아야 국물도 맛있다.” 그 말은 마치 가훈처럼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국밥집에 가면 가장 먼저 깍두기를 맛본다. 그 순간의 판단이 오늘 점심의 성패를 가른다.
외국의 레스토랑에 가면 반찬은 개인 접시에 덜어 나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국의 노포는 ‘공동체적 풍경’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김치통 하나, 깍두기통 하나. 손님이 스스로 덜어 먹는 구조지만 사실상 함께 나누는 문화다. 이 방식은 단순한 편리함을 넘어선다. 한국 사람들에게 밥상은 ‘함께 먹는 자리’라는 무언의 전제를 담고 있다. 반찬이 중앙에 놓이고, 거기서 각자 덜어 먹는 행위는 나눔과 공유의 상징이다.
노포 테이블 위의 김치통은 그래서 한국적인 집합적 정서를 대변한다.
브랜딩을 오래 해온 내 눈에는, 이 풍경이 마치 브랜드 슬로건처럼 다가왔다. 슬로건이란 무엇인가. 짧고 간결한 말로 브랜드의 철학과 태도를 보여주는 장치다. 그런데 노포집에서는 슬로건이 말로 쓰여 있지 않다. 대신, 묵묵히 김치통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우리 집은 직접 담근 반찬을 올립니다.”
“우리 집은 국물만큼 김치도 중요합니다.”
“오래된 방식이지만, 그래서 믿을 수 있습니다.”
말 한마디 없어도 충분히 강력하다. 그 작은 통이야말로 노포가 세월 속에서 다져온 가장 작은 광고판이다. 흥미로운 건 시작은 ‘검색’이었다는 점이다. 스마트폰으로 종로 맛집을 검색해 들어갔지만, 나의 기억에 남은 것은 별점도, 리뷰도 아닌 김치통이었다. 요즘 시대 사람들은 후기와 별점에 의존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현장에서 체험한 감각이다. 김치 국물을 살짝 흘린 집게, 반쯤 남아 있는 깍두기 국물, 무의 단면에 스며든 붉은 양념. 나에겐 이런 디테일이 리뷰보다 강력하게 각인된다. 슬로건이 고객을 유혹하는 말이라면, 김치통은 고객이 스스로 발견하는 증거다.
빠르게 변하는 도심 속에서, 노포의 테이블 세팅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종로는 특히 그렇다. 유행하는 카페가 들어서고 사라지지만, 곰탕집의 김치통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다. 도시는 계속 리모델링되지만, 김치통은 오히려 ‘변하지 않는 도시의 얼굴’이 된다. 그것이 도시 브랜딩의 중요한 자산일지도 모른다. 뉴욕이 자유의 여신상으로, 파리가 에펠탑으로 기억되듯, 종로의 노포 거리는 테이블 위 김치통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사람들은 거대한 문구보다 작은 디테일에서 브랜드를 신뢰한다. 노포집의 김치통은 그 집이 가진 진심의 상징이다. 김치통은 투박하고 소박하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단순한 반찬이 아니다. 시간이 쌓이고, 정성이 배고, 나눔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한 입의 김치가 브랜드의 철학보다 깊은 메시지를 전한다.
나는 김치통 있는 식당을 좋아한다. 그건 노포가 나에게 주는 가장 솔직한 환대이자, 세월이 만들어낸 가장 작은 ‘브랜드 슬로건’이다. 말 한마디 없지만, 충분히 강력하다. 슬로건보다 오래가고, 광고보다 깊이 남는다. 김치통은 노포가 세상에 내놓은 가장 단단한 한 줄 카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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