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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팅힐 Dec 07. 2024

인생 2막이 시작되었다.

유방암수술 이후 내 인생이 많이 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상 입원기간은 일주일..

5살 우리 큰아들에게
"엄마 이제 안 아프려고 병원 가는 거야.
이번만 좀 많이 자고 올게.
우리 아들~ 아빠랑 할머니 말 잘 듣고
씩씩하게 기다릴 수 있지??"

"응!! 엄마사랑해.. 아픈 거다 낫고 와!!"

항암 때문에 머리카락 없이 지낸 5개월..
머리카락이 두피를 보호하고 따뜻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는 걸 몸소 느꼈다.
머리가 시리고 지끈거려 두건을 쓰지 않으면
생활하기가 힘들었는데 마치 그 스트레스를 알기라도
하는 듯 큰아들은 항상 옆에서 위로해 주었다.

"엄마는 너무 예뻐"
"엄마~ 오늘 진짜 아름답다"
'"머리카락 없어도 왜 이리 예쁘지?"

5살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표현들로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그런 너와 일주일이나 떨어져 있어야 한다니.

입원당일..

입원하고 다음날 수술이라 12시부터 금식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전에 실컷 먹자며 신랑이랑 편의점에서
쇼핑하고 엄청 먹어대며 애써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호흡기내과에서 폐에 있던 결절을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순 없겠다며 수술을 미루고 기관지
내시경을 하자고 연락이 왔다.
역시나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내시경을 받기 위해 침대에 누운 채
기관지내시경실로 향했다.
코로나시기라 호흡기내과에는 환자가 넘쳐났고
그사이로 내가 누워있는 침대가 이동했는데 그때
마스크 위로 나를 쳐다보는 눈빛들을 잊을 수가 없다.

도대체 기관지 내시경은 또 뭘까?
전날밤 잠도 제대로 못 잔 채 검색을 했다.
모르고 맞는 매가 더 나았을까 했지만 막연한 두려움을
대비하지 않으면 도저히 감당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어쩔 수 없었다.
한마디로 기관지내시경은 물에 빠져서 죽을 것 같은데
죽지는 않는 느낌이라고 했다.

물이 무서워 발도 안 담그는 내가 내일 겪을 고통이
물에 빠져 죽기 직전 상태라니..

반신반의하며 내시경실로 들어갔다.
나의 이름과 생일확인 후 숨 돌릴 틈 없이 마취제를
입안에 뿌렸다. 그리고 긴 호스 같은 것이 입속으로
끊임없이 들어갔다.
숨도 잘 안 쉬어지는 것 같고 입안으로 물을 계속 넣는
건지 컥컥거리면 조금만 참으라는 말만 되풀이하셨다.
물고문을 당하면 이런 기분일까.
너무 고통스러웠는데 그래도 이 검사를 해야 수술도
수 있고 폐전이는 아니라는 확답을 받을 수 있으니 두
아들들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버텼다.

얼마가 지났을까.
다행히 활동성 결핵이 아니라 결핵흔적이 맞다고
다음날 수술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 진짜 수술 전까지 몇 번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건지..

제왕절개를 두 번이나 해서 그런지 수술 전 항생제 반응
검사는 아파도 견딜만했고 림프절 전이를 확인하기
위해 맞았던 유륜 주사는 예상대로 엄청 아팠다.
그냥 생각만 해도 엄청 아플 것 같지 않은가?
다른 곳도 아니고 유륜에 주사라니..!!
맞기 전 간호사선생님께 이게 그렇게 아프다면서요?
하고 물으니 안타까워하시며 다들 그러시더라고요..
하며 애써 웃으셨다.
살면서 유륜에 주사 맞을 일은 없으니 좀 더 무서웠는데
역시나 소문대로 살이 타들어가는 느낌의 엄청난

고통이었다.

그리고 수술 전 발등에 맞는 정맥주사가 남았다.
유륜주사도 무섭긴 했지만 사실 이게 가장 무서워서
한방에만 놔달라고 제발 부탁했는데 양쪽 발 모두
실패했다. 간호사선생님이 너무 원망스러웠는데
본인도 실패하고 싶어서 그런 건아니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결국 정맥주사팀 선생님들이 호출받고 오셔서
다시 시도하려고 하셨다. 이미 발등실패의 공포에
질려있었던 터라 양쪽 가슴 수술하는 거 아니니 수술 안
하는 쪽 팔에 놔달라고 울면서 부탁드렸다.
발등에 주사를 맞는다는 자체가 왜 그리도 무서웠을까?

다행히 담당 교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셔서 팔에 한 번에 주사를 맞았다.

이럴 거면 난 왜 양쪽 발에 세 군데나 찔렸을까??
속상한 마음에 또 한바탕 울었다.

드디어 수술실로 들어갈 시간이 됐다.
수술실로 향하기 전에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갔다 올게!!"
"어디 놀러 가나??"
참으로 경상도여자들스러운 대화였다.

침대로 이동하면서 천장에 전등들이 속속 지나가는데
뭔가 현실감이 없었다.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몇 분 후 침대는 수술실 앞에
도착했고 들어가기 전에 남편의 손을 잡고 웃으며 인사를 했다.

"오빠야.. 내 들어간다.."
"응.."

남편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고개를 돌렸다.
남편을 만나고 나서 단 한 번도 눈물을 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우면서도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둘째 출산, 케모포트시술, 암수술까지 대학병원
수술실이 세 번째라 긴장이 안될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지난 5개월 동안
항암치료받으며 고생한 시간이 생각나서일까.
수술준비로 왔다 갔다 하는 분주한 의료진들 속에서
차가운 수술대 위에 누워 흐느껴 울었다. 그 모습을
보셨는지 간호사선생님께서 손에 휴지를 쥐어주셨다.

얼마 후 담당교수님이 들어오셨고 교수님께 잘
부탁드린다고 말하는 중에 마취과 선생님께서 마취약
들어간다고 말하셨던 것 같은데 기억이 없다.

눈을 떠보니 회복실이었다.
부분 절제하고 인공진피랑 지방을 다시 배치해서 가슴
모양은 그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또 수술할 때 염증이 생겼던 오른쪽 케모포트는

제거됐고 왼쪽 쇄골 쪽에 케모포트가 다시 심어져
있었다.
그래서 꿰맨 부위가 총 5군데였는데 배액관은 다행히
하나만 달려있었다.

일단 수술은 잘 됐다고 하셨다.
그리고 가슴과 겨드랑이림프절에 떼어낸 부분을
정밀검사해서 결과를 알려준다고 하셨다.
일단 항암이라는 큰 산과 수술이라는 두 번째 산을
넘었다. 그때의 기분이라면 나는 뭐든 못할 것도 없다고
느껴졌다. 검사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꽤 가벼운
마음으로 입원생활을 했다.
예상치 못한 기관지내시경 때문에 입원기간이 늘어나 10일이나 보지 못한 아들들이 정말 보고 싶었다.

앞으로는 우리 가족 이렇게 떨어져 있는 시간이 없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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