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여행에서 승선지와 하선지는 단순한 출발점과 도착지가 아니다. 오히려 크루즈가 가진 단점을 보완하고 여행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기회다. 배가 운항하는 도중에 들르는 기항지에서는 반나절, 길어야 한나절 머물 뿐이지만, 거기에 더해 승선하거나 하선하는 도시에서 추가로 며칠을 보내면 한층 더 깊이 있는 여행을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크루즈 코스를 선택할 때는 기항지만큼이나 승선지와 하선지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이곳까지 연결되는 항공권 구입 또한 여행 일정과 예산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므로 꼼꼼한 계획이 필요하다. 크루즈 일정을 검색하다 보면 승, 하선지가 같은 경우가 많지만, 서로 다른 곳일 때도 적지 않다. 일정에 여유가 있다면 승선지와 하선지를 다르게 설정하고 다구간 항공권을 예약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내가 머물렀던 승, 하선지를 소개하자면,
지중해 크루즈에서는 로마, 베네치아, 아테네, 바르셀로나,
북유럽 크루즈에서는 코펜하겐, 킬(함부르크), 로테르담,
카리브 크루즈에서는 마이애미,
그리고 남미·남극 크루즈에서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등이다.
이 중, 지중해 크루즈의 아테네나 북유럽 크루즈의 코펜하겐, 로테르담에서는 숙박 없이 당일 일정만 소화했다. 특히 코펜하겐의 숙소들은 대부분 낮은 평점에 가격만 천정부지였다. 북유럽 대도시의 숙박비는 현기증이 날 정도라 가능하면 피하고 싶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서 고대의 숨결을 느끼거나, 로테르담의 마르크트할과 큐브하우스 같은 현대 건축물을 돌아보는 것은 하루 일정만 잡아도 크게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며칠을 머물며 더욱 알뜰하고도 풍성한 여행을 즐길 수 있는 도시들도 있다.
지중해 크루즈에서 로마, 베네치아, 바르셀로나는 크루즈 승선 전후로 사나흘 머물러도 시간이 부족한 도시들이다.
로마를 처음 방문한다면 콜로세움, 바티칸, 트레비 분수는 필수 코스겠지만,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테베레 강변이나 포폴로 광장을 걸어보기를 추천한다. 특히 산탄젤로성 주변의 테베레 강변은 한두 시간만 걸어도 그 매력에 빠질 것이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서는 수상버스 바포레토 2번을 타고 본섬을 한 바퀴 돌아보면 섬 전체의 분위기를 조망할 수 있다. 며칠 머물며 리알토 다리 주변의 페셰리아 수산시장이나 부라노 섬을 방문하는 것도 좋겠다.
서지중해 크루즈는 바르셀로나를 출발점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이미 경험한 여행자라면, 기차를 타고 몬세라트 수도원을 다녀오는 것도 추천한다. 운이 좋아 일요일에 방문한다면 세계 3대 합창단 중 하나인 에스꼴라니아 소년 합창단의 성가를 들으며 미사에 참여할 수도 있다.
북유럽크루즈에서는 의외로 북해에 면한 독일의 항구 도시인 킬(Kiel)에서 승선과 하선을 하는 일정이 알찼다. 킬 자체는 평범한 독일 도시지만, 킬에 가장 가까운 공항은 함부르크이므로 함부르크에 며칠을 머문다면 여행의 폭이 확장된다.
독일에는 내가 사랑하는 58유로짜리 도이칠란트 티켓이 있다. 58유로만 내면 한 달 동안 독일 전역의 완행열차와 버스, 페리까지 무제한 이용이 가능한 티켓이다.
하루 이틀만 머물러도 이득인 한 달짜리 교통권 덕분에 교통비 신경 쓰지 않고 마음대로 다닐 수 있다. 함부르크에서 62번 페리를 타고 엘베강 하구의 풍경을 감상하거나, 열차를 타고 한자동맹의 맹주였던 중세 도시 뤼벡으로 가서 유네스코 문화유산 거리를 거닐 수도 있다. 물론 함부르크에서 킬까지의 완행열차도 포함이다.
카리브 크루즈는 주로 마이애미에서 출발과 도착이 이루어진다. 마이애미 항구와 함께
카리브 크루즈배가 떠나는 주요 항구인 탐파(Tampa)나 포트로더데일(Port Lauderdale)은 모두 마이애미 근처에 있다.
마이애미에서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인 메트로무버와 트롤리가 여행자를 반긴다. 메트로무버는 마이애미 도심을 달리는 공중 모노레일이고, 트롤리는 마이애미 전역을 달리는 무료 버스다.
도심에 숙소를 잡은 후 메트로무버를 타고 바닷가를 구경해도 좋다. 며칠 머물 시간이 있다면, 차를 빌리거나 버스를 타고 헤밍웨이의 집이 있는 키웨스트로 떠나보자. 플로리다 남단에서 장장 200km에 걸쳐 작은 섬 44개를 연결하는 42개의 다리를 건너 도착하는 키웨스트는, 바다 위를 달리는 경험만으로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을 선사한다.
남미, 남극 크루즈의 주요한 출발지인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지금 비록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지만, 한 때 세계 10대 경제 대국의 저력이 남아있는 곳이다. 탱고의 거리 라보카의 카미니토에서 길거리 탱고 공연을 함께 할 수도 있고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꼽은 엘 아테네오(El Ateneo Grand Splendid) 서점에서 책 향기 가득한 문화공간을 즐길 수도 있다.
승선지와 하선지는 단순한 출발지나 도착지가 아니라, 크루즈 여행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특별한 장소이다. 동시에 크루즈에 오르거나 내리기 위해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이동해야 하는 부담도 따르는 곳이다.
다음 편에서는 승선지와 하선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수월하게 크루즈에 오르고 내리는 방법을 공유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