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척추측만 하나로 진로희망을 바꾸었다

그렇게 의대 안 간다고 했으면서

by 서제


고등학교 3학년, 대입을 준비하며 나는 밤마다 보조기를 착용하며 지냈다. 하루의 공부를 모두 마친 후 침대에 누워 적막한 방 안에서 보조기의 찍찍이 뜯는 소리를 낼 때, 나는 나의 척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 이틀이 모여 수많은 밤을 보내며 나는 고등학교 3학년, 희망하는 학과가 변하게 되었다. 약학을 배워 제약회사나 공직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중학생 때부터 키워온 꿈 사이에, 의학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에 들어오고서는 생활기록부를 약학 계열 티를 팍팍 내며 챙겨보던 나는 꽤나 굳건하게 약학과를 희망했다. 오죽하면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의대 합격 후 만나 뵈었을 때 가장 먼저 들은 말이 ‘그 성적인데도 그렇게 의대 안 가고 싶다면서, 왜 의대 갔냐?’ 일 정도였으니까.


적어도 내가 살아 있을 때에는 굶어 죽지 않을 나름대로 안정적인 전문직이라는 점, 워라밸이 괜찮은 직종이라는 점, 생명과학과 화학 공부와 실험이 재미있었다는 점에서 나는 약학대학에 가고 싶었다.




그랬던 내 마음은 척추측만을 이유로 찾아간 대학병원 방문 이후 서서히 바뀌었다.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었다.


일방적인 수용자 위치에 대한 불만족, 직업 및 대학병원 체계의 안정성, 약의 한계.


척추측만을 처음 진단받은 후, 범람하는 정보들 사이에서 서로 엇갈리는 말을 들을 때면 무척이나 혼란스럽고 불안감이 커졌다. 내 병을 내가 정확히 알고 올바른 행동을 취하고 싶은데, 정보의 접근성과 해석 능력에서 한계를 느꼈다. 꼬부랑 영어로 써진 논문의 내용들은 대개 척추측만과 어떤 요인 사이의 상관관계를 말하는 게 대부분이지, 원인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채로 고등학교 2학년, 처음 찾아간 대학병원에서 나는 컨베이너벨트 위 물건처럼 이동해 가며 환자로서 진료를 받았다. 긴긴 이동과 대기 끝에 받은 겨우 1여 분의 진료 후, 가장 크게 느껴진 감정은 환자로서의 무력감이었다. 일방적으로 정보를 ‘듣게‘ 되고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위치였다. 이때 진심으로 의학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 싹텄다. 투박하게 적자면 ’내가 공부해서 내 병 알아내고 말지….’하는 생각.


병원을 나온 뒤 여러 번 진료날을 곱씹어보며, 나는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낀 사람이 비단 나뿐은 아닐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네이버 카페니 블로그니 하며 떠도는 가벼운 인터넷 검색을 통해 나오는 정보들은 제각기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누구는 도수치료가 효과가 좋대니, 누구는 그거 다 생돈 날리는 거라 하고, 이 운동하세요, 하지 마세요가 난무하는 핸드폰 화면은 많은 사람들의 불안을 극대화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의학을 먼저 올바르고 신뢰성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학습한 뒤, 이를 전달해 주는 매개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학교에서 일일 과학 커뮤니케이터 활동을 하면서 정보 전달의 재미를 막 느꼈던 터라, 나의 바람은 그 전달의 소재가 의학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대학병원 진료가 무력감과 불만족만을 남긴 것은 아니었다. 의사라는 직종, 그리고 대학병원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안정성을 체감하게 했다. 제 전공을 가진 의료진이 각자의 자리에서 무수히 밀려오는 환자들을 차례로 보고 있는 모습을 보자 하니, 나도 그런 시스템 속 부품 1로 자리 잡아보고 싶었다.


의과대학 진학 후 이때의 내 생각과 단어 선택에 할 말이 많지만… 극강의 안정추구형 인간이 대학병원을 직접 가본 후 병원에 대한 동경이 생겼었으리라 생각하면 쉽게 보일 듯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약학에 대한 허무함을 느꼈다. 치료제가 없던 질병에 마법의 탄환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환상을 가져왔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목도한 내 질환, 척추측만은 치료제는커녕 원인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가능한 선택지는 수술과 보조기와 운동치료. 제약 산업에 종사해 사회에 기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했지만, 나도 건강해지고 싶은데 약이 내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런 생각 끝에 나는 2023년 9월 수시 원서 접수를 할 때 4 의대 2 약대를 지원했고, 운이 좋게도 수능 다음날 현재 재적 중인 대학의 최초 합격 소식을 받았다.


여러 매체에서 ’왜 의사가 되고 싶나요?‘라는 질문을 접할 때면, 흔한 답변으로 본인과 주변 사람의 아픔을 마주한 경험을 발견했었다. 나는 이 답변이 너무 싱겁다고만 생각해 왔는데, 내 일이 되니 싱겁기는 무슨 …. 결국 고등학교 2학년 때 발견한 척추측만은 몇 년 간 고집해 오던 희망 대학도 바꾸고, 나를 의대 진학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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