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사람이라 그래. 맘에 뿔난 사람들.

by 캐나다 부자엄마

"아 뜨거워. 내가 라테 마시다가 입천장 다 디었어. 내가 안 뜨겁게 해달라고 몇 번을 말해. 한국말 못 알아들어? 하긴 그러니까 여기서 커피나 말고 있지. 쯧쯧."


저녁 11시 반. 스타벅스 마감시간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6시 혹은 6시 반부터 시작해서 12반이면 끝나는 일. 커피 만드는 일은 재미있었다. 그란데 캐러멜 프라푸치노를 만들 때는 캐러멜 시럽 4번을 넣어야 하고 커피 베이스를 넣어야 돼. 레시피를 외우고 있던 중이었다. 서른은 넘었을까? 아님 마흔? 정장을 곱게 차린 여자가 악을 쓰고 소리를 지른다. 라테가 뜨겁다고 왜가리처럼 왝왝.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찬물드릴 까요? 죄송합니다. 이거는 무료 쿠폰이에요. 다음에 스타벅스 오셔서 쓸 수 있어요. 아무 드링크나 드실 수 있고 사이즈도 상관없어요. 죄송합니다."


머리를 조아린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죄송하지 않은 일에도 죄송하다고 말해야 하는 일들. 나는 그걸 사회생활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이거 한 다섯 장 더 줘요. 뭐 무료음료 한 장 가지고 뭘 어떻게 하자는 거야. 다음부터는 주문 똑바로 받아서 똑바로 만들어. 진짜 내가 사람이 좋아서 여기까지 하는 줄 알아." 여자가 무료 쿠폰을 낚아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저런 사람 불쌍해. 마음에 뭔가 품고 사는 사람. 집에서도,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도 관심받지 못한 사람. 스타벅스에서 베베꼬인 저런 방식으로 나를 알아달라고 말하는 사람.


고작 오천 원짜리 라테 한잔 시키면서 날 알아달라고 나 좀 봐달라고 울부짖는 사람. 꼭 우리 아빠 같은 사람. 우리 아빠도 그랬어. 천 원짜리 소주 한 병 사가지고 상을 들어 엎고 커튼을 찢으면서 알아봐 달라고, 인정해 달라고 울부짖었거든. 이제야 아빠가 이해가 돼. 외로웠겠구나. 그래서 그런 거야. 왜 그런 거 있잖아. 초등학교 때 좋아하는 애를 괴롭히고 싶은 마음. 그게 독버섯처럼 마음에 퍼서 썩어버린 거야. 어떻게 손쓸 수도 없게.


15평이 될까 말까 한 작은 집이었다. 한숨만 퍽퍽 쉬어도 다 들리는 그곳에서 아빠는 그리고 나는 서로를 없는 사람취급했거든. 한 번씩 아빠가 소주를 마시고 난리를 칠 때 왜 그러냐고 좀 살자고 우리도 좀 살아야 될 거 아니냐고 악을 쓰고 울었어. 처음에는 그랬지. 그러다가 아무 말도 안 해. 눈물도 안 나와. 관심을 주면 더 지랄을 해댔거든. 그냥 그 미친 쑈가 끝나면 나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깨진 소주병을 줍고 나동그라 떨어진 김치를 닦았어. 그러면 감정소모도 없으니까. 더 이상 슬프지도 않으니까.


정말 무서운 건 그때 화도 안 난다는 거야. 눈물도 안나. 항상 있던 일이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 내 운명이구나 내 팔자구나. 그래 이렇게 살다 죽는 거지. 그게 무서운 거야. 받아들이는 거. 무기력한 거. 얼굴에 빛이 없어. 전구 나간 얼굴을 하고 멍하니. 그냥 그 지랄들을 다 치워. 유리에 손이 베도 안 아파. 풍년이다. 지랄이. 아. 덧없다. 사는 게 그랬거든.


저 여자도 그럴 거야. 밖에 나와서 한 번씩, 만만한 사람들을 붙잡고 한 번씩 저 난리를 부려야 자기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불쌍해. 삐뚤어진 나무가 허리가 비틀리고 가지가 주저앉아도 자라는 거야. 이상한 방향으로.


근데 자기 자신은 그걸 모르는 거지. 주위에 아무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가지치기를 하고 막대를 꽂아 올곧게 세워주는 사람이 없는 거야. 그냥 스멀스멀 기분 나쁜 연기처럼 자욱하게 밑에서만 자라는 거지. 저 여자처럼. 우리 아빠처럼.


"언니. 저 여자한테 왜 쿠폰 그렇게 많이 줬어? 저 여자 또 와서 지랄할걸. 아니 멀쩡하게 생겼는데 왜 그래. 밤늦게 커피 시키고 왜 난리야?"


"갈 데가 없어서 그래. 외로운 사람일 거야. 관심받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는 거지. 아마 오늘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할 거야. 승자의 기분으로 얼마간 살다가 또 오겠지. 안쓰럽잖아. 저런 사람."


"맞아. 저런 사람들은 그냥 불쌍하다. 쿠폰이나 먹고 떨어져라 그럼 돼. 언니 오늘 케이크 많이 남았어. 매니저가 가져가도 된데. 나는 치즈케이크랑 크로스뮤수만 가져가면 돼. 그거 맛있어. 크로스뮤슈는 내일 학교 갈 때 점심으로 먹으려고 언니도 싸가."


열아홉이라고 했던가 스물이라고 했던가. 같이 마감을 하는 진이는 경기대학교를 다니면서 스타벅스 마감을 했다. 동그란 얼굴에 미소를 풀잎이슬처럼 머금고 있던 아이. 집에서 용돈을 받을 형편은 아니라고 했다. 언니 그래도 스타벅스는 공짜로 음료도 주고 빵도 남으면 가져가잖아. 일도 재미있고. 그런 얘기를 핫초코를 마시면서 입에 생크림을 묻히면서 하던 아이. 진이 덕에 나도 남은 빵을 싸 올 수 있었다. 할머니가 좋아하겠다. 케이크가 눌려지지 않게 가방에 넣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선택을 할 수 있다. 진이처럼 내가 가진 빛으로 나를 비추며 살 것인지 아님 아까 난리를 쳤던 그 여자처럼 내 안에 빛을 꺼트리며 살 것인지.


희망이 보인다. 터널의 끝에 빛이 보인다. 내 두 다리로 저벅저벅 빛을 향해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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