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어느 정도 모였다. 그래도 아직 목표한 돈 천만 원은 되지 않았다.
닥치는 대로 돈을 벌었다. 눈만 뜨면 나가 돈을 벌었으니까. 내가 돈 버는 일들은 다 거기서 거기라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자존심 같은 거야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돈이 없으면 그래. 자존심을 세우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다. 자존심 같은 건 거추장스러운 거야. 티셔츠에 달린 택 같은 거 단추니 지퍼같이 거추장스럽거든. 그걸 띄어내면 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아. 몸뚱이 하나로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아직도 많다고.
돈미새? 요즘은 돈에 미친 사람들을 그렇게 부른다는데 뭐라고 부르던 상관없다. 돈이 없으면 얼마나 구차한지. 사람이 사람대접을 못 받는 게 x 같은 년이니 뭐로 불리는 게 왜 그런 줄 알아? 돈이 없어서야. 돈이 있으면 그놈의 돈만 있으면 나보다 나이는 곱절로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절절매. 돈이 그래. 돈이라는 게.
스무 살이 넘었다고 해도 난 화장은 하지 않았다. 얼굴이 작아 보이게 한다거나 눈이 커지게 해주는 메이크업들이 많다던데 얼굴이 작아 보인다거나 눈이 커지는 것엔 관심이 없었으니까. 돈을 어떻게 하면 한 푼이라도 벌 수 있는지. 일을 하나라도 더 할 수 있는지가 나에겐 더 중요했다.
언젠가 올리브 영 앞을 지나다 슬쩍 그 안에 있는 화장품의 가격을 본 적이 있었다. 화장품 주제에 어찌나 비싼지 내가 그거 사다가 얼굴에 처바를 여유가 있으면 피자한판 사다가 우리 할머니랑 이틀이고 삼일이고 먹지 그랬다.
"야. 입술에 뭐라도 찍어 발라. 니 얼굴을 봐라 커피맛도 생기다가 떨어지겠다. 아니 뭐 누구 죽었어? 여기가 상갓집이야 커피집이야. 저 얼굴 좀 봐. 진짜 없던 커피맛도 떨어진다." 내가 일하는 스타벅스는 백화점 안에 있었다. 하루는 점장이란 사람이 쭉 찢어진 쌀겨 같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백화점에서 일한다고 해서 내가 명품 선반 위에 놓인 샤넬가방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어제도 여자하나가 굶어 죽었다. 2024년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먹을 것을 먹지 못해. 먹을 것을 살 돈이 없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세계에서만 세상을 바라본다. 백화점 시선으로 보면 모두 명품이고 모두 부자다. 가난이 엿가락처럼 늘어진 세월이었다. 사람들은 아니 나는 세상을 손바닥으로 한쪽눈을 가린 한쪽눈으로만 바라본다.
"안돼. 더 이상은 이렇게 살면 안 돼." 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내가 사는 세상은 언제나 흰색 아니면 검은색만 존재했다. 부자 혹은 거지. 무지개도 일곱 빛깔이 있다던데 난 세상에는 오직 2가지의 정답만이 존재한다 믿었으니까.
그래서 떠나기로 했다. 가진 건 쥐뿔밖에 없지만 서도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가로질러 가면 저기 넓은 세상에 한국말 말고 꼬부라진 영어를 쓰는 나라에 가면 100년 넘은 나무 잔뿌리처럼 그렇게 수많은 답들이 존재할 테니까.
된장인지 똥인지 꼭 찍어먹어 보고 싶었다. 할머니도 아빠도 아니 우리 집에서 어떤 사람도 가보지 못한 나라에는 이런 나라도 괜찮을까 싶었거든.
가진 게 없다는 게 무기가 되기도 한다. 지킬 건 없다. 할머니는 80이 넘었다. 아빠는 집을 나간 지 몇 달이 되었다. 아니 일 년이 넘었던가? 언젠가 서울 지하철 역에서 아빠를 본 것 같다. 아빠였던가. 아는척할 용기는 없었다. 아빠 미안해. 아빠 미안 나라도 잘 살고 싶어. 아빠 가난을 그리고 아빠를 할머니를 주렁주렁 모래주머니처럼 달고 살 자신이 없어요.
난 내 살길을 찾아서 갈게. 아빠도 잘 살아줘.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빨라졌던 기억이 난다. 내 몸 깊은 곳 어디서부턴가 아빠를 밀어내고 있었다. 도망치자고 침몰하는 아빠를 붙들고 같이 가라앉지는 말자고.
발걸음이 멀어지다가 숨이 가쁘게 뛰고 있었다. 아빠로부터 가난으로부터.
모든 걸 다 버리고 떠날 수 있다.
가진 것이 없으니까. 내가 가진걸 김치전 뒤집듯 뒤집으면 답이 보인다. 가난하다는 게 가진 게 없다는 걸 뒤집으면 그렇다. 지킬 것이 없으니까 모든 걸 버리고 떠날 수 있다.
할머니한테는 내가 모은 돈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누가 볼까 봐 통장을 매일 가슴에 품고 다녔다. 잘 때도 통장을 베개피에 넣어 잠이 들었다. 그 통장만이 그 안에 든 돈만이 날 구할 수 있다. 돈이 그렇다. 돈이 가난에서 사람을 꺼낼 수 있다. 오직 돈만이. 사람도 구하고 사람도 살게 한다.